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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University 학부생 황지수양. 꿈은 댓가로 이뤄지는 것.

먼저 간단하게 소개를 부탁해.
음, 내 이름은 황지수고 나이는 21살로 한국으로 따지면 대학 2학년생 나이야. 현재는 워싱턴 D.C에 위치한 아메리칸 대학 (American University)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있어. 
 <- 인터뷰 당일날 필자가 찍은 황지수양

흠, 국제관계학이라 하면은 구체적으로 어떤 거야?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는 이해하기 쉽게 ‘국제정치학’나 ‘정치외교학’이라 말하지만 정칙 명칭은 School of International Service, 즉 SIS라고 해. 경영이나 언어같은 국제 관계학에 관한 많은 것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데 국제 정치학이 중심인 학부야.

 

오호, 듣고 있으니 그 과에 지원한 동기가 궁금해지는데? 그런 선택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어린 시절은 어땠어? 

난 정말 전학을 많이 다녔어. 서울에서 태어나서 분당에 잠시 살아다 대전시의 홍성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시골에 가까운 동에네 살았거든. 그래서 학원보다는 자연이 가까운 환경 속에서 즐겁게 뛰어 놀며 지냈지. 그리고 전학을 자주 다녔던 게 지금 내 성격에 많은 영향을 준 거 같아. 1,2년에 한번씩 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면 친구를 속성으로 사귀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데 성격이 원만하고 밝은게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좋다는 걸 알게 된거야. 어디서든 명랑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지금의 성격이 그 때 덕분인 것 같아 난 감사해. 이런 둥글둥글한 성격도 좀 안 좋은 점이 있는데, 필요할 때도 화를 잘 못내겠는 게 그런 점이야.

수업 시간에 조금 놀라울만큼 적극적이었던 네 모습이 그런 배경으로 인한 거 였구나. 공부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했던거야? 어땠어?
사실 어렸을 때 학원을 따로 다녀본 적이 없어. 왜냐면 어머니가 학원을 보내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지고 계셨거든. 대신 혼자서 책은 많이 읽었던 것 같아. 위인전을 정말 좋아했는데 특히 워싱턴과 링컨을 좋아했어. 또 부모님의 영향으로 성경 공부를 하며 모세와 요셉을 존경하기도 했지. 이런 위인들을 동경하다보니 난 어렸을 때 부터 늘 꿈이 컸던거 같아.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지수 네 성격이 그렇게 늘 발랄할 수 있던 것이었구나.. ^^ 
난 아직도 니가 2개월 앞두고 준비했던 외고 입시에 합격해서 모두를 놀래켰던 기억이 생생해. 참 대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지. 그 당시 이야기를 좀 해볼까?

금방 얘기했지만 난 정말 겁은 없고 꿈은 큰 아이였어. 소꿉친구들은 알텐데 난 늘 내 성적과 현실에 관계 없이 ‘난 나중에 꼭 미국으로 유학을 갈꺼야’ 라든가 ‘난 대학, 하버드로 갈꺼야’등등의 발언을 늘 했었던 거 같아. 사실 광무여중에 입학할 때 내 전교 석차는 98등이야. 얼마나 내가 현실 파악이 안되는지 알겠지? 그래도 그 후로는 모든 시험에서 반에서는 2, 3등 전교에서는 십 몇등을 유지할 정도로 아주 눈에 띄는 등수는 아니지만 꽤 잘했었던 것 같아. 그렇다 해도 그 당시에 내 꿈을 듣던 친구들은 티는 안냈지만 속으로는 허풍떤다고 생각 했을꺼야.

그러다가 나랑 같은 반이던 중학교 3학년 때 막연했던 미국 유학 꿈이 구체화 됐던것 같은데? 그때 우리 반에 7막 7장이라는 책이 유행하면서 유난히 유학 이야기가 많아졌었잖아. 나도 그 때 잘 모르면서 미국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었는데… 물론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흑.
아.. 기억난다. 너랑 유학 관련 책을 돌려 읽고 같이 수다떨고 했었지. 근데 진짜 신기한건, 유학 갈 수 있는 기회가 그 때 딱 왔었어. 작은 할아버지가 미국에 계시는데 3학년 때 날 맡아주시겠다고 하셨었거든. 사실 중학교 2학년 말에 IMF로 인해 아버지가 회사를 관두시면서 내심 이제 유학은 건너갔구나 했었는데 그런 기회가 오니깐 너무 들떴던 거야. 그런데 또 할아버지가 사정이 생기셔서 좌절이 됐었어. 그렇게 되고 나니깐, ‘아 내가 정말 뜬 구름 잡고 있었구나’ 싶더라고. 또 유학에 대한 오기도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무작정 서울에 유명한 외고로 진학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지.

<- 중학교 졸업 앨범 속의 황지수양

그 때 네가 대뜸 한영외고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실 난 내심 걱정이 됐었어… 소위 전교 석차가 한 자리라는 친구들도  떨어진다는 명문 외고를 불과 2개월 남겨놓고 준비하기 시작한다니 말야. 하지만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단어를 외우는 모습이나 쪽지에서 엿보이던 니 간절함 때문에 섣불리 염려의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지켜봤었어. 그래도 너는 결국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1지망으로 선택했던 중국어과에 합격했었잖아.

솔직히 그 때 나도 붙으리라고 기대를 하지 않았었어. 몇 년을 준비해온 똑똑한 지원자도 많을텐데 2개월 준비한 내가 되리라 생각치도 않았던 거야. 물론 정말로 간절했긴 했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밤마다 꼭 유학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왔었거든. 그래도 정말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가능성이 없기에 난 준비할 때 그렇게 떨리지도 않았어. 합격 발표가 났을 때는 정말 아버지가 직접 성적을 확인해보실 정도로 믿기지 않았어. 아버지가 실직하신 후라서 명문고에 합격한 내가 집안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네가 유학반에 지원하고 또 시험을 통과해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난 나와 달리 니가 꿈에 점점 다가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럽고 대견하기도 했어.
그런데 사실 막상 붙고 나서 한동안 정말 막막하기는 했어. 아버지 추천으로 유학반에 가게 되었긴 했는데 정말 열심히 해도 외국에 살다온 친구들 실력을 따라잡기란 힘들었거든. 특히 가족이 다 부산에 남아있어서 고 1때는 학교 앞에서 홀로 자취를 했었는데 조금 외로웠어. 또 내가 SAT를 잘 칠꺼라는 확신도 없었고 만약에 합격해도 등록금 마련에 대한 걱정도 컸거든. 무엇보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들을 보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 싶어 유학반을 나올까 몇번 고민하기도 했었어. 그래도 부모님은 힘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많이 응원해 주셨었어. 그 때는 정말 고등학교 등록금이랑 유학반 비를 내는 것도 벅차던 시절이었는데도 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려.

많이 의외구나… 늘 용감하게 꿈을 향해 살아가는 친구로 널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 고민과 힘겨운 시간이 있었는지 몰랐어. 혼자 많이 힘들었겠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좋은 기억이 없는 거 같아. 늘 경제적으로 힘들고 공부도 너무 버거웠거든. 더 잘된 후에 말하고 싶어서 밝힌 적은 없지만, 고 1때는 자취방에서 매일 밤 소리나서 울곤 했어. 옆 방 사람이 시끄럽다고 벽을 칠 정도로 말야. 정말 힘든 건, 한영외고가 강남에 위치한 사립고등학교라 그런지 유학반 친구들이 다들 경제적으로 풍족했거든. 그런 친구들 속에서 늘 나만 힘든 거 같아서 그게 정말 힘들었어.

니가 이렇게 네 꿈을 이루기 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힘든 시절이 있었구나. 부모님이 경제적인 문제는 다 해결해주는 나로서는 공부가 어렵다고 쩔쩔매던 게 조금 창피해지는구나..
응, 정말로 꿈은 댓가를 요구하는 거 같아. 내가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원하던 대학에 진학한게 아니거든. 그 만큼의 시련을 겪었기에 이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난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어. 나는 적어도 원하는 목표를 향해서 고생하고 있는거니깐. 또, 눈물 나게 힘든 시절을 겪은 후로는 왠만한 시련에는 끄떡 하지 않을 만큼 어른스러워 진 것도 같아 참 감사해. 세상에 울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때마다 투정부리고 울면 어떻게 살아가겠어. 그리고 정말 크게 얻은 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는 점이야. 그게 내 진로 결정에도 큰 영향을 줬구.

안 그래도 네가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이유가 궁금했어. 특별한 이유가 있는거야?
그렇게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겪고 나서 크게 달라진 마음은 남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됐다는 거야야. 옳은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길거리를 걷다가 구걸하는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몇 천원 정도를 쥐어 주곤 해. 또 기독교라는 종교의 영향도 있는것 같아. 기독교에 선교 단체가 많기 때문에 북한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많아지며 북한이나 아프리카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됐어. 그래서 외교 분야를 공부하고자 이 과를 지원했었어.

아메리칸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거지? 총 등록금이 얼마 정도고,  장학금은 또 어느 정도 받고 다니는거야?

<- 대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황지수양.

학비는 기본이 3만 2천불 정도가 들어. 재외국민 전형을 지원해서 반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어. 등록금은 어떻게 어떻게 모아서 1학기는 다닐 수 있었어. 그런데 생활비가 한달에 기숙사를 들어가면 600불인데, 아파트에 나와 살기 때문에 매달 700불 정도가 들어. 사실 생활비를 내가 아르바이트 해서 마련하거든. 집안 사정 문제도 있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던 이유가 컸어. 그런데 2009년 초부터, 환율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서 먹을 걸 아껴다면서 생활했었어. 쌀이 없어서 밥을 거르기도 하고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식당에서 두끼를 해결하기도 했었어. 정말 잠도 줄이고 먹는 것도 줄이며 아등바등 살았는데 그 고생을 6개월 이상 하려니 한계가 오더라구. 사실 후회를 하면 안되는데도 왜 내가 그때 외고로 진학해서 왜 그때 유학반에 들어서 왜 그때 미국 대학을 지원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며 많이 힘들기도 했었어. 또, 내가 하던 웨이트리스 일이 돈도 적게 줄뿐더러 먼저 들어온 몽골리안 종업원들에게 많이 부려먹여졌던거야. 정말 내게 소원이 있다면 온전하게 공부만 하며 대학을 다니고 싶다는 거야. 정말 공부가 하고 싶었어.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하지도 못했으면서 학과 공부가 싫어 틈만 나면 휴학하고자 했던 내가 어떻게 보면 배가 불렀던 것 같기도 하구나. 그래서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거구나. 언제 들어온거야?
한국에는 올해 2월 달에 들어왔어. 학비랑 생활비를 집중적으로 마련해야지 돌아가서 몇년동안 마음 푹 놓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어렵게 휴학을 결정했어. 솔직히 돈을 벌려고 한국에 들어왔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릴 때는 조금 창피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다들 잘 이해해줘서 고마웠어.

한국에 와서 어떤 일들을 했어?
처음 한달은 송파구 유명한 어학원에서 보조 교사로 일했었어. 오후 두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데 함께 일하는 강사들의 히스테리도 심하고 업무량도 많아서 그 때는 서럽기도 하고 정말 힘들었어. 아침에는 영어 과외를 3개를 맡아서 아침 일찍 나가서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 되곤 했었는데 사회 생활이 왜 어려운지를 체감할 수 있겠드라고. 학생은 힘들어도 시간을 운영하는 주체가 자신이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데 사회 생활은 그렇지가 않잖아. 또 은근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오는 까칠함이 버티기 힘들기도 했구.
그러다가 아는 분이 한국은행에서 조사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 알려주셔서 면접을 보고 은행 조사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 영어 교사보다는 널널했지만 팀의 막내로 허드렛일을 해야 하고 눈치를 봐야하는 생활은 여전히 쉽지만은 않았어.
그러던 중 교회에서 알게 된 교수님이 서울대 객원교수로 가시게 되면서 녹색 성장에 관련된 책을 쓰게 되셨거든. 교수님이 측은지심으로 조교로 받아주셨고 그 후로는 녹색 성장에 대해 배우면서도 조금은 편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조교 알바랑 과외를 합쳐서 한 달에 중소기업 초봉 정도를 받고 있는데 또 아버지가 하시는 일도 요새 잘 풀려서 공부를 하러 미국에 돌아갈 여유가 생긴 거 같아.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되고 싶은 인간상이 있다면?
북한 인권 단체에서 강연하러 오신 분이 그러더라구. 자원 봉사자나 개개인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정말 많은데 제도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권력자와 재력가가 부족하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미국에서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아 한국에 돌아와 우리 나라를 위해 내 학문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내 인생의 롤모델이 오프라 윈프리이거든. 그녀처럼 대중을 끄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 되서 외교 분야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현재는 가장 영향력을 효율적으로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정치인으로 보여서 현재로서는 정치인이 되고 싶어. 물론 내 목표를 이루는데 정치인이라는 직책은 도구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언론인이 더 적합한 직업이라면 언론인이 되고 싶어. 이렇게 성공하든 저렇게 성공하든 난 내 힘으로 많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그게 내 꿈이야.

앞으로의 가까운 계획은 어떻게 되니?
올해말까지는 일단 휴학하고 지금 녹색성장 관련해서 쓰는 책인 Korean Way 2를 교수님을 도와 마무리할 것 같아. 그리고 어서 대학생으로 돌아가 원없이 공부만 하고 싶어. 생활비를 버는건 고달프긴 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지폈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한 경험이라고 생각해. 이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즐기면서 할 자신이 있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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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기
자신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취업과 스펙에 몰두하는 20대들이 많지만 그 중에는 용감하게 소신있는 삶을 살아가는 친구가 있다는 걸 그녀를 통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인터뷰하며 느낀 점은, 자신의 꿈을 위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그녀도 늘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것. 그녀의 말대로 ‘꿈은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 동안 남몰래 많은 눈물을 흘려왔다. 늘 그녀가 지금처럼 씩씩하고 쾌활하기를 응원하겠다.


고함20
고함20

20대의 소란한 공존 [고함20]의 대표 계정입니다.

1 Comment
  1. 이인순

    2011년 4월 19일 08:13

    지수야 하나님께서 너의삶을 이끄심에 감사하며, 너의 삶이 하나님의계획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삶이 되리라 믿는다.. 언제나 믿음 안에서 기쁘고 감사하면서.. 또한 세상에 가장 멋진 배우자를 만난걸 축하하며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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