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10년 새해가 밝았다. 1999년 종말 얘기가 한창 나돌았고, 2000년대에는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모든 업무가 마비될지도 모른다는 괴담을 듣고 자란 게 엊그제 같은데, 21세기가 된 지도 어언 10년차에 들어섰다는 소리다. 지나간 해를 정리하고 나서 맞는 새해. 누구나 저마다의 새해 계획을 짜고, 소망을 품는다. 새해가 오는 것은 그저 시간이 축적되고 있는 일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새 마음을 먹게 된다. 왜냐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과거가 모두 싹 사라질 수도 달라질 수도 없으나,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은 우리의 기분을 새롭게 만든다. 그만큼 처음이 주는 의미는 굉장하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처음처럼’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듯 말이다.


 앞서 말한 ‘처음’에는 새 각오로 마음을 다진다는 좋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면, 동시에 ‘처음’은 기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조금은 서툴고 부족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처음은 보다 더 열의에 차 있는 긍정적인 면과 약간은 미흡하고 완벽하지 못한 면 모두를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처음 중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 독특한 처음’이다. 없었던 것을 만들어 내거나 하지 않았던 일을 선보일 때 나타나는 신선함을 갖췄을 뿐 아니라, 미처 익숙함이 배기도 전이라 자연스레 뒤따르는 작은 결함마저 없는 그런 ‘굉장한’ 상태의 처음을 말하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센세이셔널한 데뷔작 정도라고 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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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펼쳐지는 그림은 무엇인가? 으레 작품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만화, 드라마, 영화, 문학작품 등 이야기가 있는 구조의 산물들이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오늘만큼은 그런 통념에서 살짝 비껴가도록 하자. 오늘 선보일 첫번째 주자는 바로 ‘노래’다. 기사 작성 전 불특정다수에게 무작위로 이루어진 간단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충격적인 데뷔작(좋은 의미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의미였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은 의외로 노래 부문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국 대중문화사, 그 중에서도 가요계의 새 역사를 썼다고까지 평가되는 서태지와 아이들은 물론이요, 신인답지 않은 놀라운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스타덤에 오른 휘성, 3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이자 포화 상태인 현재의 아이돌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로 여겨지는 동방신기,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으로 대중에게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 준 클래지콰이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데뷔곡/앨범을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데뷔한 샤이니의 경우도 의외로 높은 응답이 나왔다. 브라운아이즈의 벌써 일년, 세븐의 와줘, 이효리의 솔로 데뷔곡 10 minutes, 이정현의 와, 싸이의 새도 충격적인 데뷔였다고 입을 모았다.

 거론된 곡/앨범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점 외에도,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본격적으로 랩 뮤직을 선보였고 우리 가락을 가요에 넣는 등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휘성은 정통 R&B를, 클래지콰이는 일렉트로니카 중심의 음악을 펼침으로써 여러 장르의 길을 열기도 했다.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가수를 지향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아카펠라 댄스그룹이라든가, 컨템퍼러리 밴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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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적로나 질적으로나 점점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영화 쪽을 살펴 볼까. 스크린쿼터 제도로 시끌시끌했던 게 불과 몇 해 전인데, 마치 그런 일이 없다는 듯 영화계는 요즘 매우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관객 동원 기록에 새로 진입한 영화가 두 편이나 있었다. 영화계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다양한 요소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으로 바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수준을 들 수 있겠다.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은 결국 갖가지의 훌륭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말이다.

 영화계의 밝은 미래를 점칠 수 있게 하는 원동력 역시 영화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영화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좋은 배우, 좋은 각본, 좋은 감독, 좋은 배급사, 투자자 등 복잡다단한 요소가 서로 얽혀 있다. 배우들의 처음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이번엔 감독에게 초점을 맞춰 보자. 과거에도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뽐내는 수작(秀作)들이 있어 왔고, 그 경향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멜로 영화로 유명한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은 그 유명한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전성기의 심은하와 한석규가 나왔던 바로 그 영화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전개,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볼거리를 제공하는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은 <범죄의 재구성>이었다. 장르극이라는 점이 한계가 될 수도 있었으나 서울 77만, 전국 관객 200만을 동원하며 최동훈이라는 무서운 신인의 존재를 알렸다. 4885라는 숫자를 두려워하게끔 만든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역시 화제의 데뷔작으로 꼽을 수 있다. 관객수는 비록 기대에 못 미쳤으나 신인 감독의 재기발랄함과 영화관이 고스란히 들어간 데뷔작도 있었다. <살인의 추억>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은 배두나 주연의 <플란다스의 개>였는데, 평단의 반응도 준수했고 관객들도 어느 정도 마니아층을 이루었다. 적당한 인기와 감독의 스타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영화로는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를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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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든든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감독 이야기는 이만 접고, 배우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본의 아니게 사진에 실린 내용이 거의 영화 데뷔작에 쏠려 있다. 요즘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 활약 중인 유승호의 철부지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집으로>는 꼬마 유승호가 찍은 첫 영화였다. 할머니와 같이 사는 맹랑한 꼬마 역할을 어찌나 잘 소화했던지 그 잔망스러운(?)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한국 괴수 영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괴물>에서도 꽤 괜찮은 신인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게 누군고 하니 고아성이다. 분량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관객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만큼 좋은 출발을 했다. 외국 영화 쪽에서는 나탈리 포트만이 이름을 올렸는데 <레옹>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 쪽이 상대적으로 빈약한데, 확실히 드라마 하나로 스타덤에 오른 사례는 많으나 ‘청렴결백(?)’한 데뷔작이 아닌 경우가 많아(타 프로그램 단역/조연까지 포함하기 때문) 의외로 찾기가 어려웠다. <순수>에 나온 명세빈과 <학교 2>의 심지호, <눈먼 새의 노래>의 안재욱 정도에 그쳤다. 명세빈, 심지호의 경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캐릭터와의 일체감이 인상적이었다면, 안재욱은 신인 치고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히려 상당한 수준이었던 연기력 덕에 대중들의 눈에 더 잘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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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다루어진 여러 가지 데뷔작 가운데 국내 이야기보다 해외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은 아마 만화가 유일할 것이다. 해외라고 해도 만화왕국의 위엄을 무시할 수 없는 일본의 이야기가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장 규모도 다르고 유명한 작품들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일본에 비해 한국 만화계가 힘에 부치긴 하나, 우리도 자랑할 만한- ‘시작부터 남달랐던’ 작가들이 있었다.

 <오디션>, <DVD>, <하이힐을 신은 소녀> 등 다수의 히트작을 기록한 천계영의 첫 단편집은 <Come back home>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온 단편은 <TALENT>다. 소녀팬들이 특히 많은 순정만화 계통에서 선을 자유자재로 쓰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쪽으로 캐릭터를 그렸던 천계영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고 그녀의 작품들은 많은 만화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궁>으로 유명한 박소희도 데뷔작 <Real purple>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매력은 장르나 내용이 달라도 결국 드러나게 되는 모양이다.

 많은 만화팬들이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만화, 혹은 잊을 수 없는 만화로 꼽는 두 작품이 모두 데뷔작이었다는 사실은 경악스러웠다. 무수히 많은 편수가 나왔으나 변함 없이 대단한 사랑을 받고 있는 <원피스>는 오다 에이치로의 첫 작품이었다. 그뿐이랴?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 등 소싯적 우리들의 맘을 설레게 한 멋진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있는 전설의 농구만화 <슬램덩크> 역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데뷔작이다. 웹툰도 데뷔작이 대단한 인기를 모은 사례가 상당히 많은데 정철연의 <마린블루스>, 낢의 <낢이 사는 이야기>, 루나의 <루나파크>가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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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작이 다름 아닌 TV 광고였던 경우도 꽤 많다. 짧은 시간 내에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구하고자 하는 광고의 특성을 잘 살린 광고가 대박을 치게 되며 덩달아 주인공들까지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굳이 신데렐라라고 표현한 이유는 광고로 주가가 급상승한 초대박 신인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TTL 소녀 임은경을 기억하는가? TTL이라는 생소한 브랜드가 우리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건,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소녀가 브라운관에 얼굴을 자주 비춘 후부터일 것이다. 몹시 난해해 의미를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광고와,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소녀. 둘은 시너지 효과를 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카피와 함께 유명해진 빨간통도도화장품의 모델은 트랜스젠더 연예인 1호 하리수였다. 얼굴 클로즈업 때는 단순히 예쁜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목젖을 보여줌으로써 트랜스젠더라는 바를 드러냈던 이 광고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이 꼭 반감은 아니었던지 그녀가 선전한 화장품은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화장품 광고로 유명해진 케이스로는 엔프라니의 신애도 있다. 상당히 기품 있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신애와 ’20대여 영원하라’는 카피가 어우러진 광고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엔프라니를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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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을 알아보는 마지막 시간이 왔다. 저마다 쟁쟁한 필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남달랐던 데뷔작은 어땠을까. 늦은 나이에 등단하였으나 우리 시대의 작가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는 박완서의 첫 작품은 <나목>이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았고 여전히 왕성한 집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200쇄 인쇄에 빛나는 명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조세희의 데뷔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 첫 작품이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PC통신을 달구는 것도 모자라 책으로까지 출판된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도 이영도의 데뷔작이라는 사실.

 일본 문학계의 두 거장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도 범상치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국내팬들에게도 유명해진 계기는 아마 <상실의 시대>의 대히트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데뷔작이 얌전히 묻혀 있던 것은 아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3만부 판매를 기록했으니 기대 이상의 실적이었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의 데뷔작이이자 문제작이었는데,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쓰인 친절한 안내 문구만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강했던, 애초부터 잘났던 이들의 숱한 데뷔작들을 뽐내 독자들을 기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처음에도 예외로 칠 수 있는 특이한 처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진부하긴 하지만, 우리는 앞서 돌아본 훌륭한 작품들이 어쭙잖은 요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최동훈 감독이  <범죄의 재구성>을 쓸 때 얼마나 원고를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비단 이것이 그만의 일인 것일까. 가수는 최상의 목소리와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녹음을 하고 또 하고, 감독은 시나리오를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며, 만화가 역시 톤을 붙였다 떼기도 하고 대사를 넣었다 지우기도 하면서 애쓰고 애써 첫 산물을 만들어 낸다.

 피나는 노력과 치열하게 매달리는 집념이 처음이라는 불리한 상황 가운데서도 ‘예외’를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묵묵히 걸어온 과정이라는 길을 보지 못한 채, 좋은 결과를 이루어 냈다고 마냥 부러워하거나 괜히 폄하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짝이는 결과 뒤에 가려진 그/그녀들의 수고로움을 먼저 바라볼 줄 아는 사려깊은 눈을 가지는 것이 간절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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