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선 당신의 어머니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두 번째로 뇌리를 스치는 단어는 맹목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모성애에 대한 지론은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초등학교 바른생활에서부터 중학교 도덕시간을 거쳐, 고등학교 윤리시간에는 ‘ 모성애=맹목적인 것 ’이라고 배웠다. 한국인 어머니상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자식에게는 갓 지은 따스한 밥을 먹이시고 당신은 가마솥에 남은 누룽지를 몰래 긁어먹는 몸빼입은 어머니 아닐까.



 베트남의 어머니라고 다르겠는가. 탱탱했던 고무줄이 느슨해질 때까지 온 몸을 동여매는, 알록달록한 꽃이 수놓인 몸빼바지 대신 하얀 아오자이를 입는 베트남 어머니. 영화 하얀 아오자이는 베트남의 헌신적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국의 몸빼 바지가 강인한 어머니의 힘을 보여준다면, 베트남의 하얀 아오자이는 베트남 여성의 고결함과 단아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단아함을 부각시키려다 단조로워진
하얀 아오자이. 

 하인으로 일하던 곱추인 남편이 부인에게 청혼할 때 “이 하얀 아오자이는 당신 꺼야.” 하며 아오자이는 처음 등장한다. 부인은 아오자이가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아오자이를 재단하기로 결심한다. 아오자이를 아이에게 물려주기 전에 남편과 잠자리에 드는 부인의 모습은 단아함을 부각시킨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단아함’을 유독 강조한다. 하얀 아오자이에 잉크를 쏟은 둘째가 ‘단아함’ 이라는 규정을 어긴 듯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에서 어머니의 말씀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피난을 가면서까지 깃대에 하얀 아오자이를 끼우고 어머니가 누누이 강조한 단아함을 지키겠노라고 다짐하는 모습은 애틋하다 못해 단조롭다.



 모성애를 삼켜버린 하얀 아오자이.



제목이 ‘하얀 아오자이’ 이다 보니, 감독은 지나치게 하얀 아오자이를 부각시키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흔적이 영화 곳곳에서 보인다.


마지막 씬에서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가는 여인들의 무리의 모습은 급히 끝내려고 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피자 여덟 조각 중 마지막 한 조각을 먹지 못해 버려야 할 때의 아쉬움이라고 해야 할까. 후반부에 첫째 아이가 헬리콥터의 폭격에 의해 죽은 것에 대한 마무리와 엄마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이 곁들여진 씬이 필요했다. 아이가 죽은 것은 당시의 폭격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풍랑에 휩쓸릴 뻔 했던 어머니와 아버지 중 어머니만 즉사하고 아버지만 살아남는 것은 정말 작위적이었다.
 
엄마의 지극정성한 모성애를 한순간에 무너뜨려야 깊은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한국영화 ‘마더’는 극단적인 모성애를 춤으로 승화시키는 수미상관식 씬을 연출함으로써 탄성을 자아내게 하지만, 이 영화는 바보같이 미련한 엄마의 모습을 여과없이 나열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전혀 모르는 관객이 알 정도로 치밀했으나, 후반부는 공들여 쌓아 놓은 모래탑을 파도가 휩쓸고 가듯 허술했다.



시대적 배경을 부각시키는 요소들
시대를 고찰하기에는 안성맞춤.



 베트남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고 이전에 ‘알포인트’ 라는 음침한 냄새를 풍기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 터라 ‘하얀 아오자이’ 는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인상 탓에 막연히 따스하기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프랑스 지배하의 베트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어둡고 음울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대사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베트콩과 베트민 등은 당시의 시대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이 숫자 하나 하나가 적힌 달력을 하나하나 찢어가는 숏 역시 중간 중간에 등장했다. 이것 역시 1966이라는 숫자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적인 장치 아니었을까.



모성애 부각시키려다 부부애 돋보인
감성온도 36.5° 에 그친 미적지근한 영화.



 음울한 배경 가운데 솟아나는 부부애는 한층 부각되었다. 곱추인 남편 역의 배우는 정말 진국이었다. 부인이 죽고 난 이후, 어둠의 장막 속에서 덜덜 떨고 주저하는 바보같은 모습을 훌륭하게 연기해 낸 것은 대단했다. 배우의 평소 모습이 어떠할까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연기가 일품이었다. 물론 영화의 초점은 모성애를 부각시키는 여배우였을 테지만, 남자배우는 연기 그 이상의 무엇을 표현해 냈다. 아내의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무지했던 곱추인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소설 ‘풀이 눕는다.’ 에 등장하는 곱추 풀의 모습과 그의 모습이 교차되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풀이 눕는다.’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흔히 시간이 흐르고 기억은 희미해진다고들 한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반복될 뿐이다. 희미해지는 것은 이름뿐이다. 아내의 죽음 이후 담담하게 물통을 이고 걸어가는 씬에 연이어 나오는 분홍빛 꽃잎이 흩뿌려지는 가운데 행진하는 모녀들의 모습을 그려낸 씬은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해지는 그의 분홍빛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암울한 시대적 배경과 베트남 여성을 상징하는 하얀 아오자이는 잘 묶어냈기에 ‘전쟁으로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하얀 아오자이’ 는 여전히 아름답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하얀 아오자이가 분홍빛 사랑의 매개물이었다고 도출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뼛속을 저미는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감동의 농도가 너무나도 얕다. 명치를 누를 정도의 감동을 전하기에는 다소 미적지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