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 듣기만 해도 몸서리처지는 부담감에 맥을 못추게 만들고 이상야릇한 번역투의 문체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그 것! 네이버 지식인의 독후감이 없으면 읽고 나서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교양인들의 필독서! 

내게 고전은 그런 의미였다. 세상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인정하며 권장도서로 추천하지만 정작 읽고 있는 나로서는 명작인지 아닌지 알 턱이 없었다. 여러 차례 소리 내어 읽어가도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어려운 문장들은 나를 깊은 사색(=수면)의 상태로 인도했다.

그러던 중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만나 고전에 대한 나의 생각이 깊은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 글을 읽을 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 그런 역사적인 경험을 소개할 만한 간증은 없다. 대신 이방인을 통해 70여 년 전에 쓰인 글귀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참이다.



그 해 여름

어떤 이에게는 단지 더웠던 여름이라고만 기억될 수도 있는 그 해 여름, 뫼르소의 인생에 변화가 찾아온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치뤄진 어머니의 장례식,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어색한 시간들, 돌아오고 나서의 변함없는 생활에서 뫼르소는 그 어떤 감정의 고저(高低)없는 일상을 보낸다. 오히려 그에게 슬픔과 비통함을 기대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 A의 상황에서는 항상 B의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회의 정의에서 탈피해 순순히 그가 느끼는 대로만 행동하는 뫼르소는 쿨하다 못해 어리석어보일 정도이다. 그러던 중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레몽을 알게 되고 휴가를 떠나서 아랍인을 죽이게 된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예의 그 변함없는 어조로 나지막이 읊조리는 태도에 독자는 당황하게 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뫼르소가 자신의 미래가 걸려있는 재판에서마저 보여주는 무관심한 태도이다. 자신의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서도 그는 이방인인 것이다.

이렇던 그가 마지막 부분에 교도소에서 신부를 앞에 두고 소리를 내지른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마음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터져버렸다고 설명한다. 지금껏 냉정하고 건조한 태도로 일관하던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 보여준 이 인상적인 반항은 대체 무엇일까?




<강요배, 까뮈의 초상화,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69865>


실존주의와 까뮈

소설의 근간이 되고있는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 프랑스 및 유럽의 사회 문예 사조로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이어 나타났던 사상이다. 세계대전과 스페인내전 등을 겪으며 이들이 느낀 절망감을 극복하는 힘이 필요했다. 현실이 이성적이기를 바라고 대단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의지이자 바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원적으로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것이 현실세계이자 인생이다. 이를테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내일을 사는 것 같은 부조리함이다. 우리의 의지와 현실세계에서의 모순이 극명한데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어져 그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바탕이 된다. 개인은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살아가야 한다. 매일을 선택의 고민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우리는 당장 점심메뉴를 고민하는것 조차 지겹고 버겁다. 무엇을 해야 할지, 졸업 후의 미래가 불안해서 차라리 미래가 정해져 있는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무엇이든 내가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이 이처럼 짐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을 일찍이 사르트르는 알고 있었다.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짐을 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인간과 비합리적인 세계와의 모순을 인정하고 이 모순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절망감과 허무감을 이겨내는 힘이다. 어차피 끝이 있는 인생을 악다구니 쓰며 살아갈 것 없이 죽어버려야 겠다, 라는 식의 생각은 실존주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만약 이대로의 해석이었다면 뫼르소는 감옥에서 단 한 번의 일갈(一喝)없이 조용히 죽는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뫼르소가 신부를 앞에 두고 보여준 반항은 바로 이 모순에 대한 반항이다. 부조리를 발견하고 이를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죽는 순간까지 이 의식을 놓지 않는 것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열정이자 희망, 반항의 방식이다.


젊음, 반항의 대명사 ‘제임스딘’
(출처:
http://blog.naver.com/gogumada78?Redirect=Log&logNo=80028670671)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그것

201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닥친 허무함. 고용 없는 성장에 치솟는 등록금. 사회에 눈을 떠 갈수록 비린내 나는 현실에 눈감고 싶어지는 매일. 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요구에 신문을 사보지만 막장을 달리는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문을 덮고 학점이나 잘 따는 것 뿐 이다. 그러다 어느새 되돌아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나조차도 모르는 내가 있다.

발버둥쳐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현실에 눈을 감고 이방인으로 살텐가, 똑바로 마주하고 인생의 주인으로 살텐가. 설령 당신의 인식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자신의 인생을 관조하듯 보내고 쿨한 사람이라는 시선에 어깨가 으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쿨한 태도의 그 서늘한 무심함에서는 어떤 열정과 애정도 찾을 수 없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인생을 무관심속에 내팽개쳐 본질 없는 실존만이 남을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나와 세계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다.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시시각각 세상을 관찰하고 감시하라. 당신의 깨어있는 의식이 바로 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