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월요일 오후 7시 30분. ‘대학, 대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기획 강좌의 3번째 시간 ‘우리에게 대학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의 강연이 있었다. 지난주 김동애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 본부장의 ‘대학 이렇게 바꾸자’가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시간강사 문제를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대학’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현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학이 어떤 의미인지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은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본인의 이야기를 잠깐 했다. 시간강사를 거쳐 전임강사와 교수를 하면서 학생들 앞에 서 온 것이 벌써 18~19년에 이른다는 그는 재임용에 탈락해 여전히 ‘고용이 확실히 보장되지는 않는’ 상황에 있었다.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쳐온 그가 재임용에 탈락한 이유는 뭘까. 개신교 학교의 방향을 거스르고 불상 앞에 절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기에 소송을 걸었고 그는 대법원에서까지 학교의 판단이 충분한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학교는 이에 불복하고 계속 ‘버티기’로 일관 중이다. 이찬수 원장은 대법원이라는 가장 최상의 법 집행 기관에서 나온 판결조차 무시할 수 있는 대학사회의 특이한 구조가 신기하다고 말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교육자가 말하는 대학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대학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실재가 된다. 핸드아웃에 적혀 있던 짤막한 말이 마음 속 깊이 와닿았다. 필자만 하더라도 철없는 고등학생 시절엔 대학을 당연히 거쳐야 하는, 하지만 도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기존보다 훨씬 어려운 미지의 세계로 인식했었다. 그러면서도 대학이라는 곳에 내가 발을 디뎌 그 구성원이 되고 나면 사회적 동물로서의 역할이 커지리라 기대했고, 그만큼 머릿속도 마음속도 고루고루 채워진 멋진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대학생이라는 직업으로 3년 반 정도를 살아가는 지금, 대학은 내게 아늑한 울타리 안의 공간이다. 제법 잘 알려진 서울 4년제 대학교는 굳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름값’을 해 준다. 사실은 별 볼일 없는 내게 ‘오 의외로 공부 좀 했나 보네’하는 기분 좋은(?) 착각을 들게 해 주는 프리미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사회에 나가면 조금은 영향력이 적어질 것을 아는 영악한 휴학생의 머릿속에서 대학은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대학이 나의 사회적 신분까지 결정하다니. 역시나 대한민국의 20대로 살아가는 나와 대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찬수 원장은 대학을 참 설명하기 애매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대학은 요즘 들어 그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예전에는 학문의 상아탑, 지성의 전당이라고 여겨졌던 곳이지만 이미 고등학교 졸업자의 80~90%가 진학하는 대학은 특수성과 진정성을 잃은 지 오래고, 실제 교육과정 역시 보다 ‘실용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대학을 구직자가 취업 이전에 잠시 대기하는 곳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하려고 해도, 취업 준비 시에 현실적으로 대학이 주는 실효는 낮은 편이다. 어느새 부정적인 이미지로 대표되는 대학. 그것은 대학으로부터 ‘된통 당한’ 개인 하나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번 강의는 ‘대학’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상당한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학과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작은 이야기 몇 꾸러미가 쏟아져 나왔다. 대학의 역사에서부터 대학이 지향해야 할 정체성까지. 강연은 헐거운 부분을 내보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 강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학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은 이때에도 어김 없이 지적되었다. 대학이 무수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역사가 짧은 점도 한 몫 할 것이다. 국내에서 대학교육의 독자적인 체계가 짜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정리가 잘 된 듯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에서 살펴 보면 엉킨 실타래가 가득하다. 

 
 대학이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었다고 비판받은 지는 오래지만, 그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강연 중 나온 ‘대학과 부동산’, ‘대학의 정체성, 시설인가 조직인가’ 관련 이야기를 듣고 모르는 부분을 많이 알게 되었다. 교육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예산을 재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든 장기든 금전적인 수익을 쌓을 수 있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대학은 과연 무엇을 위해 몸집 불리기에 힘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밖에도 자본 앞에 굴복하는 대학의 모습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교육자로서의 소신보다는 경영자의 평가가 우선시되는 풍토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경영자, 교수, 학생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겠지만, 보통 교수나 학생 모두 자본 앞에 무력화되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사회에서도 기업논리는 그대로 적용되기에 효율성을 따지는 모습은 별로 낯설지 않게 되었다. 가르치는 사람은 ‘무조건’ 많은 연구 실적을 만들어야 하고, 배우는 사람은 한 사람의 학생으로 평가받기보다는 ‘학생 한 명이 오면 1년에 얼마’ 이런 식으로 구체적 액수로 기억되니 말이다. 

 대학과 관련된 문제들이 넘치기에 쉽게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이찬수 원장 역시 해결책을 궁금해하는 시민들에게 ‘딱 부러지는 답’을 내릴 수 없는 점을 많이 아쉬워했다. 학생들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어떤 것이 있을지 물었을 때, 그는 요즘 사람과 사람 관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자본이고 그 흐름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이 와중에 점점 더 개인주의, 파편주의로 가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어떤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결집하는 모양을 보여주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결국 교과서같은 답이지만 직접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투표 정도만이, 학생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고 말을 맺었다. 대학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묻는 ‘어마어마한 질문’에서도 정답은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연대 가능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뜻을 모아 연대하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아래로부터의 의식을 깨우는 운동이 필요하지만 과연 그것이 실현 가능할지는 두고봐야겠다고 ‘소극적인’ 답을 내리는 그를 쉽게 비난할 수 없었다. 매우 현실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강연 중에 대학과 종교를 많이 엮어서 이야기했던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에게 ‘종교와 대학은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며 자신만의 정의를 내린 한 대학생의 발언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대학은 완벽한 종교다. 기업이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등록금이라는 헌금을 내고 교수라는 신에게 학점이라는 은혜를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하는 이 말이, 언젠가는 시덥잖은 농담으로 치부되는 날이 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