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일을 끝마치기는 그리 어렵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글귀는 필자의 대입 수험생 시절, 독서실 옆자리 학생의 샛노란 포스트잇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대개 독서실의 포스트잇에 쓰인 글귀들은 자극을 주고는 했지만, 유난히 이 글귀는 내게 자극이 되지 못했다. 옆자리 학생이 ‘시작한 일은 끝을 보라.’ 는 글귀를 새겨 놓았더라면 내게 천만볼트짜리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시작이 반이다.’ 라는 글귀에 콧방귀를 뀐 이유는 단 하나. 난 시작을 밥 먹듯이 잘 하는데 내가 한 시작은 대개 일을 완성하지도 못한 채 중도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일명 일을 끝맺지 못하는 끝맺음부전증. 

▲ 출처 : http://cafe.naver.com/bukhansandic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70


올해로 14년째
끝맺음부전증 앓는 중.

올해로 14년째를 맞이한 끝맺음부전증. 병원에 가도 약국에 가도 고칠 방법이 없는 나의 고질병이다. 내가 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7살 때 나간 사생대회에서였다. 주제는 자유였고 난 평소 좋아하던 만화 캐릭터를 그리기로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노란색 크레파스로 열심히 스케치를 했다. 이제는 색칠할 차례. 처음에는 의기가 충만해서 쓱쓱 빈칸을 색깔로 채워 넣다가 어느 순간에 허공에 시선을 둔 나를 발견했다. 내 그림의 주인공인 캐릭터들은 완성되었지만 문제는 배경을 색칠하는 것이었다. 배경은 들판이었는데 곳곳에 무채색의 꽃과 나무가 하늘하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시간은 30분밖에 남지 않았고 색칠은 해야 하는데 내 손은 마비되어 버렸다. 주위의 친구들은 놀다가도 30분이 남자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반면, 난 처음의 의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결국 내 그림은 완성되지 못한 채 희끄무레한 배경 상태로 제출되고 말았다. 수상결과는 예상대로 참패였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색칠을 끝맺지 못하는 증상은 여전하다.

▲출처 : http://cafe.naver.com/hcinterne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820

서고에 꽂힌 책 사이에 낀 책갈피들
반쯤 본 영화파일더미들

고함20에서는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제대로 된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완벽하게 읽어가야 한다. 끝맺음부전증을 앓고 있는 내게 책의 마지막장에 손이 이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어려운 책들을 읽을 때는 특히 더 그렇다. 말의 고삐를 슬쩍 내려놓으면 날뛰는 말을 다시 잡기 어렵듯이, 책갈피를 한 번 끼워놓으면 책을 다시 펼치기가 어렵다. 끝맺음 부전증에서 탈피하고자 꾸역꾸역 읽다 보면 어느 새 난 꿈속을 헤매고 있다. 눈을 뜨면 책 한구석에 축축한 지도를 그린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증상은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볼 때도 발동되고는 한다. 내 컴퓨터 바탕화면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다운받은 영화들은 좀처럼 줄어들 기색을 보이질 않는다. 이것저것 건드린 영화는 많은데 아직 결론을 보지 못한 영화가 다운받은 영화들의 반을 차지한다. 영화나 책은 흐름이 중요한 법인데 난 늘 흐름을 놓친다. 인상 깊은 대목은 잘 기억하는데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이 턱없이 부족한 나를 발견할 때면 한없이 움츠러들곤 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plokiki?Redirect=Log&logNo=45125968

끝맺을 수 있게 말.해.주.세.요

기사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나의 끝맺음부전증은 또 발동하려 한다. 문제는 내가 내 증상을 알면서도 참 고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모범답안 같은 방법은 잘 알고 있다. 매사에 주의를 기울여서 끝맺음을 잘 하도록 습관을 바꾸면 된다. 이는 공부비법을 물어 보는 학생에게 앉아서 공부를 하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여전히 끝맺음부전증을 앓고 있는 난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겠다. 혹시 끝맺음부전증에 대한 처방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슬며시 털어놓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