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는 것이 참 오묘하다. 읽기보다 생각하기를 권하는, 활자보다도 빈 공간이나,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게 해주는 대단히 감성적 문학.

1년 전, 우연한 자리에서 이 시집을 건네 받았다. 중요한 결정 혹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자주 찾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계신데, 그날도 역시 이러한 이유로 모교에 찾아갔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애기를 하던 중 참고서 사이에서 발견한 고 박경리의 유작 [버리고 갈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두꺼운 참고서나 때 뭍은 문제집 속에서 어색하게 눈에 띈 책. 그 사이에 놓인 시집의 제목을 오래도록 읽은 기억이 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영정사진 속 이를 훤히 드러내고, 표정으로 웃고 계신 어르신이 생각났다. 자주 보지 못해 애틋한 손주 손녀를 보는, 따뜻하면서도 아련한 할머니의 표정도 생각났다. 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제목에 삶의 무소유, 쓸쓸함, 깨달음, 평화로움, 미련이 다 들어 있었다. 길지도 어렵지도 않은 시들로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그날 복잡했던 내 마음은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참 홀가분해 졌다.

이 시집은 함축된 시의 느낌보다 나직이 인생을 돌아보면서 마치, 이제 모든 것에 미련이 없는듯한 넉넉한 자세의 시들이다. 모진세월 거친풍량을 견뎌낸 애잔함이 묻어나기도 하고, 세상살이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묻어나기도 한다.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오롯이 적막뿐인 쓸쓸한 집에서도 자신에겐 펜이 있고 원고지가 있다라고 그는 비우고 또 비웠다.

또 자기 성찰적 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을 꼬집는다. <밤>이라는 시를 통해 내가 세상의 게으름뱅이가 된 것 같았다. 내 육신 속의 능동성은 녹슬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또 시<어머니>는 섬김의 도리를 생각하게 하였다.

결국 우리가 알던 토지의 박경리가 아니라 그저 시인 박경리로, 삶의 끝을 마주한 한 사람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가득차다. 분명 홀가분하다라고 했지만 역시나 잔잔해진 눈으로 찬란했던 삶을 뒤돌아 볼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는 고 박경리의 생전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지만 김덕용 씨가 그린 그림도 페이지 곳곳에 실려있다. 마치 판화 같은 그림은 토지의 박경리를 기억하는 분들도, 오롯이 시만을 놓고서도 잘 맞는다. <어머니>라는 시를 살펴보면, 앞 페이지에서 읽고 난 후 장을 넘겨 한참을 한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마치 생살을 찢겨나가는 듯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두 여인을 통해 잘 표현하듯 시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한다. 

 <확신>,<현실 같은 화면, 화면 같은 현실>,<핵폭탄>등 4장에 있는 시들을 읽으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다. 풍요로움과 욕망으로 보지 못해 무감각해지고 무뎌졌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시들도 박경리 시집에 있었다. 생명과 자연의 존엄함을 잊고 살았다. 너무 빠르고 너무 많이 소비하며 산 것에 대한 비판, 박경리는 그런 ‘무딤’에 대한 경고를 마지막까지 잊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이 책을 건네 받은 이후로 살면서 마음속 엘리베이터가 저기 지하 560층쯤 내려가 있을 때면 이 책을 펼친다. 짤막짤막한 문장들을 몇 개 읊고 나면, 차갑고 휑하던 주변이 따뜻한 공기로 체워지는 것만 같다. 삶이 문학이 되고 문학이 삶이 되어 살았던 인생. 모진 운명 속에서 단단한 성취를 이룬 삶 이지만 결국 그도 인생은 이렇게 말갛게 웃으면서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러가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산다는 것 – 박경리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人命在天)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