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쌍의 남녀가 죽어있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그들은, 그러나 그에 굴복해서 끝내 자살을 택할 만큼 나약한 이들은 아니었다. 사랑의 도피를 하려 했지만 오해에 의해 결국 죽음을 택한 저간의 사정을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들의 세상에서는 아마 이렇게 떠들어댔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집안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누구나 아는 고전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운명에 굴복하여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을 개척하고자 노력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상대방의 죽음을 못 이기고 자살한 것이다. 원래 죽음의 순간에 펼쳐지는 일들과 온갖 심리 변화는 알기 어렵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지 않은가?



 

박하사탕의 김영호, 그가 철길에 서기까지를 설명하는데 이창동 감독은

135분의 런닝타임을 사용했다. 어째서 언론은 5분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미디어가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누군가 죽으면 그 죽음이 알려지기 무섭게 원인을 분석하고 떠들어댄다. 물론 유족들만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다. 타살 여부를 알기 위해서나, 그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 혹은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결국 그 죽은 이의 삶과 죽음을 낱낱이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언론의 손을 타면 그들의 죽음은 보다 단순해지고 만다. 수없이 많은 심리 변화와 다양한 이유 –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는 본인도 확신할 수 없는 – 중에 입맛에 맞는 것을 찾아내 꼬리표를 달아버리고 만다.


지난 7월 5일 전남 강진에서 37살 신모씨가 자살했다. 혈중 알콜 농도 0.184%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몰다가 경찰에 적발된 후 귀가 조취된 신씨는 그러나 경찰서를 나선지 40여분 만에 경찰서 건물 뒤편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 되었다. 신씨는 무면허 음주 운전으로 집행유예 기간이었으며 경찰 관계자는 이를 비관해 자살 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 소식은 대부분의 언론사에 의해 다음과 같은 제하로 대서특필 되었다.




“음주운전 적발 비관‥30대 男, 경찰 조사 뒤 자살”


 



물론 정황상 신모씨의 자살 원인은 음주 운전 적발과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경찰도 그와 관련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고 신모씨가 만취 상태였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할 점이다. 그러나 그 같은 사실은 무시하고 이제 막 수사에 착수한 하나의 가능성을 마치 사실인양 보도한 것은 고인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일보의 기사 제목은 더 가관이다.


 


‘왜 난 음주단속에 잘 걸릴까…’ 30대男 비관 자살


 


이 기사 역시 신모씨가 자살한 바로 다음날 쓰여진 기사이다. 신모씨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만취 상태에서 그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실제로 신모씨가 음주 단속 후 죽기 전까지 남긴 문자 메시지는 ‘미안해,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 는 내용 뿐이엇다.


그러나 이 기사 하나로 신모씨는 음주 운전에 대한 죄의식도 없이 운이 없음만을 탓한 것으로도 모자라 고작 그러한 일로 자살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기사를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경찰이 수사 중이라는 부분을 읽고 자살 원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삼가자고 생각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후속 기사나 수사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결국 강진에 살던 37살 신모씨에게 미디어가 선물한 묘비명은 “‘왜 난 음주단속에 잘 걸릴까…’ 30대男 비관 자살” 인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평소부터 우울증을 알아오던 학생이 선생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다음 날 자살하면 그의 자살 원인은 선생님의 꾸지람이 된다. 또 우울한 영화를 본 후 자살하면 그의 자살은 영화 탓이다.



작년 한 해 자살한 청소년들 중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경우가 29%에 달했다고 한다. 유서를 남기지 않은 탓도 있지만 청소년기의 충동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특성상 분석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청소년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예민하고 충동적인 동물이며 이 같은 특성은 죽음의 순간에 극에 달한다. 차라리 죽고 싶어질 정도의 힘든 일을 겪고도 떨쳐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들이 보기엔 사소하다 싶은 일을 겪고도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의 죽음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 원인을 쉽게 규정지어서 망자의 명예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야 하고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보도해야 할 그들의 책임상 어떻게든 자살의 원인을 규정지어야 할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독자들의 입장에서 그것이 기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기사의 흥행을 위해 망자의 죽음을 두고 자극적인 장난질을 친 것인지 헷갈린다면 언론도 자신들의 행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