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정치 기사가 있고, 그 수많은 기사들은 또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인용한다. 그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는 우리가 친숙하게 들어본 것도 많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본 기사는 정치 기사를 포함하여 여러 글들에서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자세한 설명 없이는 무슨 사건인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렇지만 정치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던, 그런 사건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정읍발언

간추려서 말하자면 ‘정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가 수립에 대한 발언을 하다.’쯤이 될 것이다. 정읍 발언의 역사적 의의는 남북한 인사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분단국가 수립에 관한 언급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을 중심의 ‘북한 단독 정부’의 실루엣을 작성하는 물밑작업이 시작되었고, 남한에서도 단독 정부에 대한 지지 여론이 조성되긴 하였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당시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사였다는 점에서 큰 파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6.3 항쟁

6.3 항쟁은 64년도에 있었던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던 중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한 자본 마련을 계획하였다. 일제 강점에 대한 배상 형식으로 자본을 마련하려던 시도인데, 이를 위한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의 관련 메모가 공개되면서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김종필 의장이 원한 것부터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고, 오로지 ‘차관’을 제공 받기 위해 굴욕적인 협상을 벌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대한민국은 재일교포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하여 정상적인 발언권을 갖기 어려워졌다. 여하튼 이 회담에 대해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단식 투쟁 등의 형태로 저항이 지속되었으나 한일 국교 정상화를 막지는 못하였다.

  

( URL = “blog.ohmynews.com/airon/archive/…page%3D2″ )

 

김종필의 메모

1. 청구권은 3억 달러(무상 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2. 장기 저리 차관도 3억 달러로 한다.

3. 한국의 대일 무역 청산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라의 메모

1. 청구권은 3억 달러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2. 무역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한다.

3.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합의 사항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천5백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 차관)

 

71년 대통령 선거

선거 진행 과정으로 보나 그 결과, 또 그 이후 전개 모습으로 보았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로 손색이 없다. 71년 대통령 선거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겠다”며 선거판에 뛰어든 박정희 후보와 ‘40대 기수론’을 들고, 또 같은 당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후보를 경선에서 제치고 올라온 김대중 후보의 싸움이었다.

지방에서부터 선거 유세를 진행했던 김대중 후보는 서울에서 마지막 유세를 벌였는데 ‘나무에 사람이 열린 것 같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3선 개헌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출마를 선언한 박정희 후보는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 본인의 회고에서 말했듯 당시 금액으로 수백억을 투입한 ‘금권선거’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94만 표 차이로 신승을 거두었다. 이 선거가 결국 박정희에게 민심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게 했고, 결국 유신 체제로 나아가는 데에 큰 자극제가 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한국군과 미군의 장교와 사병이 미루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이 작업 중지를 요청했는데, 한국군과 미군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자 북한군은 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렀고,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미국은 데프콘3를 발령하고 전투기와 폭격기 등을 전진 배치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김일성이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판문점은 남북한 공동 관할구역이 되었다.

삼당 합당

삼당 합당은 대통령의 ‘거대한 여당’ 유지에 대한 집념이라는 우리나라 대통령제의 특징과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1990년 이루어진 삼당 합당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으로 재등장한 사건이다.

87년 대선 당시 야권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의 저조한 득표율만큼 민주정의당의 총선 득표율 역시 저조하였다. 따라서 여소야대의 국면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대통령의 힘은 견제 받게 되었다. 이러한 정국을 타계하기 위해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통일민주당, 김종필 전 총리가 총재로 있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게 된다.

삼당 합당이 정치적 후진성을 나타내는 이유는 ‘인위적 과반수 만들기’였다는 점과 ‘역사적 명분이 결여된 합당’이라는 것이다. 유신 체제를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 계열의 김종필 전 총리와 전두환 전 대통령 계열의 인물인 노태우 전 대통령, 그리고 이 둘을 독재라며 극렬히 반대하고 대립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이 세 인물이 ‘통합’의 파트너가 된 것이다. 즉 그동안의 명분이나 신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정치적 손익 계산을 통해 이루어진 합당인 것이다.

  ( URL = “www.hani.co.kr/section-021128000…046.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