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것은 첫번째 편집후기. 첫 회의 주인공은 권력의 핵심에서 언저리로 이동하게 될, 현 편집장이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던데. 과연 나도 적당한 때를 알고 떠나는 아름다운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1. 
 수업시간에 졸린 눈을 치켜뜨기 바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지워버린 지 오래인 지금과 달리 어릴 적의 나는 그럭저럭 똘망똘망했다. 본인이 굳이 나서지는 않지만, 왠지 임원을 시켜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이미지.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성적이 좋았기에 높은 성적과 비례하는 선생님들의 신뢰도도 나쁘지 않았고, 그 덕에 곧잘 회장, 부회장을 맡아 했다. ‘과연 내가 그 자리에 적임일까?’라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다. 투표 순간에는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전전긍긍하면서도, 막상 자리에 오르면 ‘내가 될 만하니까 됐겠지, 뭐’하고 쿨하게 넘겨버렸으니 말이다.

2.
 나이가 들수록 자기 객관화가 조금씩 이루어진 덕에, 나는 결코 바람직한 리더상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뒤에서 든든하게 힘을 실어 주는 조력자 혹은 리더라는 직책과 무관하게 혼자 열심히 사는 평민이 성격상 더 잘 맞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고2 때부터 지금까지 뭘 나서서 해 본 적이 없다. 랜덤으로 얻어 걸린 팀플 조장을 해 본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다 2010년 일이 벌어졌다.

3.
 당시 고함20은 2기를 뽑은 후, 새 학기를 맞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젊은 피가 수혈된 상황이라 구성원에도 변화가 있었고, 야심찬 커리큘럼을 꾸려가며 제 2의 도약을 노리던 시점이었다. 한편 멀티플레이어로 편집장 역할을 능란하게 해 낸 테싸는 4학년이라면 누구나 맞는 진로/취업 압박 때문에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새로 들어온 파릇파릇한 2기가 임원이 되는 시나리오는 심한 무리수였고, 원년 멤버 중 남은 사람은 페르마타와 라별 둘 뿐(우리의 지난 겨울이 어땠는지를 예상할 수 있다). 이때, 휴학생이라는 더없이 큰 이점을 가진 나는 단번에 편집장이 되었다. 싱겁지만 진실이다.

4.
 3월, 4월, 5월, 6월, 8월 중반, 9월. 약 6개월 간 편집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녔다. 스스로를 실력자라거나 사람들을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아서, 처음에는 명함 내밀 때 무척 쑥스러웠다. 외부 사람들을 만날 때 ‘고함20 편집장입니다.’라고 인사 건네는 것조차 주저했었다. 그러나 차츰 달라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식상한 말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5.
 3월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아마 서른 번 정도는 되는 회의를 진행하며 어쭙잖은 말솜씨는 약간이나마 늘었고, 기사쓰기나 회의 참석에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월례회의를 하면서는 얄팍한 PT를 만들 기회가 생겼고, 일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때도 막힘없이 고함20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고함20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졌다는 점이다. 우선순위 중에서도 늘 1, 2등을 다투는 우선순위-라고 설명하면 맞겠다. 덕분에 딸이 3학년 1학기인지 2학기인지조차 헷갈려하는 부모님도, 고함 회의하러 간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 주신다. 처음에는 돈도 안 나오는 거 매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한다고 타박 주셨는데. 막상 편집장 이름 붙은 명함 건네 드리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 보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구나.

6. 
 6개월 간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생겼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스쳐지나간다. 마라톤 회의가 될 줄 알았는데 멤버들이 집중해서 잘 따라주고 그날따라 나도 상태가 괜찮아서 고효율의 회의를 했던 날, 새벽녘까지 허심탄회하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MT가 떠오른다. 잘 쓴 기사가 재깍재깍 나와줬을 때만큼이나,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조각들이 고함20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조화를 이루며 섞여들어가는 장면을 발견했을 때 무척 기뻤다. 모든 사람들에게 애정과 열정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자진해서 발을 들인 이 곳의 의미가 점점 커져간다면 정말 바랄 것이 없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조율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을 텐데, 제대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늘 요구만 했던 까탈스런 편집장은 아니었을는지.



▲ 이런 편집장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출처 : http://mm.search.nate.com/search/imgSearchViewer.html?q=%C6%ED%C1%FD%C0%E5&o=0&is=0&e=7&c=&kq=%C6%ED%C1%FD%C0%E5&fe=0&fs=0&dq=&sq=&sz=0&ci=0&gp=0&ext=&pn=1&dpi=0



7.
 시간은 마치 급류처럼 흘러갔다. 어느덧 나는 물러날 때가 되었다. ‘편집장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대해 하소연하기도 했으나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후련하고 시원하다고만은 못 하겠다. 고함20의 편집장이라는 수식어는 그만큼 내게 각별했고 소중했기 때문에.
단지 편집장이라는 자리와 이별하는 순간인데도 마음이 참 허하다. 이러다 고함20 활동 그만두는 날에는 눈물 그렁그렁한 채로 감수성 풍부한 소녀마냥 키보드 두드리고 있을까 두렵다. 어쨌든 난 이렇게 물러난다. 이제 고문으로 격상되는 일만 남은 듯(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