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썜 다이어리에서는 이번 주와 다음 주, 2주에 걸쳐 중, 고등학교의 영어 내신 시험에서 나타나는 ‘시원하게 까고 싶은’ 현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먼저 이번 주에는 영어 시험이 영어를 언어과목이 아닌 암기과목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현상에 대해 알아볼게요.
중, 고등학교의 중간고사 철이 지났습니다. 슬슬 소위 ‘꼬리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학생들의 희비가 갈릴 텐데요. 우리나라 내신 시험의 현실을 생각해봤을 때 이러한 희비는 주로 얼마나 암기를 꼼꼼하게 잘 했는지에 의해 갈렸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단지 내신시험에서는 사회, 과학, 기술가정, 도덕 등 암기 위주의 학습이 통한다고 여겨지는 과목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내신에서는 소위 기초학력을 측정하는 과목인 ‘국영수’도 암기과목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죠.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어떤 과목이든 암기과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대한민국 내신시험의 위력입니다. 국어시험을 공부하려면 작품을 ‘느끼려고만’ 노력해서는 100% 망하죠. 자습서의 파란 글씨들을 싸그리 외워야만 합니다. 학생의 주관적 감상? 아니죠. 자습서가 말하는 대로의 문체, 운율, 상징, 문학적 기법들만이 정답입니다. 수학? 기본 공식이나 증명들, 수학적 논리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 푸는 문제들보다 조금 어려워서 한 번에 풀기 어려운 수준의 문제집, 그 풀이를 통째로 외우는 것만이 고득점의 지름길이에요. 심지어 수학의 경우 대학교에서 수학을 배워도 같은 공부 방법이 통하는 것이 현실이죠.

(이미지 출처 : http://sesilbia.blog.me/90076410245)
외워라, 100점이 보일 것이니
잠시 다른 길로 샜네요. 저는 지금 영어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에 있는 건데 말이죠. 영어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필기시험이라는 현실적 한계 앞에서 학생들의 영어 구사력, 이해력에 대한 평가는 매우 간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학교 시험이라는 이유로 시험에 나오는 모든 문장, 단어는 교과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어 실력으로만 그 문제를 풀 수 없는 학생들도 꼼수를 쓸 수가 있는데요. 바로, 시험 범위의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버리면 길이 있다는 거죠.
이러한 통째로 암기하는 방법은 제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혹은 그 훨씬 이전부터 내려오는 비법입니다. 사실 저는 많은 친구들이 영어시험 전에 교과서를 죽어라 외우고 있는 광경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어요. 저는 그러한 방법에 무슨 효과가 있겠냐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본문을 외우게 해보니 분명히 효과가 있기는 있어요. 어렵게 생각 안 해도 간단히 답이 나와요. 본문에서 문제가 나오니까요. 본문을 외우고 있으면 빈칸 넣기는 문제없죠. 본문을 이미 알고 있으면, 본문 그대로를 따온 문제의 지문을 읽을 필요도 없어요. 시간도 단축되죠.
그래서 외우기 싫다는 아이들에게 어쨌든 시험을 위해 본문을 외우는 것은 필수라고 말하고요. 본문 빈칸 넣기를 반복적으로 시키거나, 본문 해석을 통으로 영어로 옮겨 쓰는 것과 같은 활동을 시키면서 본문 전체가 뇌에 저장되도록 하죠. 이러한 방법을 통해 공부를 하면, 열심히만 한다면 분명히 한 번의 시험에서는 좋은 성적이 나와요. 교과서의 학습 목표에 맞게 정확히 내용을 하나하나 공부하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점수를 올릴 수 있죠. 오히려 학습 내용에 집착하면 빈 칸 넣기와 같은 간단한 문제에서 데일 가능성만 높아져요.
이러한 방법이 익숙해진 학생들은 외국어 시험을 공부할 때 지속적으로 이런 방법을 쓰면서 공부를 해요. 고등학교 때도 초반엔 본문을 다 외우려고 노력하고, 나중에 문제집 등이 시험 범위로 추가되어 도저히 다 외울 수 없을 땐 열심히 한글 해석을 읽으며 그거라도 외우려고 노력을 하죠. 많은 대학생들도 제2외국어 등의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준비할 때 본문을 외우는 것을 미덕으로 삼곤 해요.

(이미지 출처 : http://cafe.naver.com/graffitischool/3227)

내신만 잘 받으면 뭐하나, 영어 실력이 없는데
하지만 이러한 공부 방법, 아무리 생각해도 코앞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공부법이에요. 암기해서 당장의 시험을 잘 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다음번에는 더 많이 암기하고, 그 다음 번엔 더 많이 암기해야만 해요. 애초에 영어 기본 실력이 늘지 않기 때문이죠.
물론 문장을 통으로 암기하는 것은 외국어 학습을 위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기는 해요. 하지만 내신 시험을 위한 암기는 문장 구조나 대화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적 작업인 데다가, 그 양마저 너무 방대한 양을 한 번에 외우다보니 암기에 의한 학습 효과가 매우 떨어져요. 아이들은 외운 것을 시험이 끝나는 족족 까먹고, 새로운 것을 다시 외우고, 다시 까먹고, 또 외우고, 또 까먹어요. 즉, 이러한 공부 방법만을 고수해서는 결국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당장의 점수도 물론 급하겠지요. 하지만 원래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력은 단번에 오르는 것이 아니에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계단식으로 실력이 늘어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에요. 2주일 뒤의 시험만 내다볼 게 아니라, 1년 뒤의 점수를 내다보는 혜안이 필요해요. 그러려면 단순 암기에만 집착하기 보다는, 조금 실력이 뒤쳐졌다면 지금 시험범위 이전의 진도부터 천천히 이해하는 공부를 아이들에게 하게 해야 해요. 영어에 대한 이해력이 생기면 심지어 본문 암기도 더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을 거고요. 더 영어를 잘 하게 되면, 애초에 암기 없이도 영어 내신 시험 따위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