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한 상속녀 패리스 힐튼은 쇼핑하는 데에만 2시간에 1억원어치를 썼다. 반면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와서 유명해진 이종룡씨는 IMF때 진 빚 3억 5천만원을 갚기 위해 10년 동안 하루에 두 시간씩 자며 9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렇듯 돈은 지독히 상대적이다. 그리고 그 상대성이 빚어내는 소외감과 욕망이 돈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

돈의 천박함을 철학처럼 떠받드는 사회를 그린 소설가 박범신의 신작 <비즈니스>를 통해 돈에 대해 돌아보자.


인생이 ‘비즈니스’라 여기는 그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

박범신의 신작 <비즈니스>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들의 과외비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주인공이나 도시 개발로 모든 것을 잃은 ‘옐로’를 동정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즈니스’라고 여기는 주인공의 친구 주리와, 이제 갓 불혹을 넘겼음에도 곧 죽을 노인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남편을 손가락질 할 것이다. 작가의 의도 또한 위와 같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는 내내 주리와 남편을 쉽사리 욕할 수 없었던 것은 작품 속 그들의 모습이, 그들의 대사가 현실의 우리와 어렴풋이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대학 동기 주리는 구시가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주인공과는 달리 증권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신도시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는 인물이다. 남편이 ‘스폰서’이자 ‘비즈니스 상대’라고 생각하는 주리는, 그렇기 때문에 남편의 불륜을 눈감아줄 수 있다 여기고 본인 역시 다른 남자들과의 잠자리를 즐긴다. 또 친구인 주인공에게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성매매를 주선하기까지 한다. 주리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문패와 같은’ 도덕은 걸던 대로 걸어놓고, 다만 ‘요즘 아이들이 가장 혐오하는 실패한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남몰래 돈을 벌라고 주인공에게 충고한다. “나중에 정우가 좋은 대학 못 가고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무엇을 주었느냐고 너한테 물으면 뭐라고 할래?” 주리의 대사는 연속극 또는 소설 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 그야말로 현실 속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부모에게 뻔뻔한 원망을 하는 아이의 입장일 수도, 이를 묵묵히 듣고만 있는 부모의 입장일 수도 있다. 주인공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10년 째 고시 패스에 실패하고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관심을 끊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마저 회피하는 가장은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음직한 인물의 모습이다.

위의 인물들은 우리의 과거일 수도, 현재일 수도, 그리고 미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적어도 ‘있는 자’들의 잉여 재산을 홍길동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가는 ‘옐로’나, 떠나간 ‘옐로’의 아들을 품고 꿋꿋이 살아가는 착한 주인공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상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 그리고 옐로보다도 더 동정 받아야 할, 연민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주리와 남편의 모습에서 현실의 우리를 바라보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고 마음속으로 선한 주인공을 응원하고 있다면, 최소한 주리와 남편을 손가락질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주리는 뒤늦게 사랑을 찾았고, 주인공의 남편도 한 때는 인권 변호사의 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돈’이 먼저인 세상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즈니스 권하는 사회

<비즈니스> 속 인물 관계의 우화적 구조는 그들이 사는 사회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개발의 바람을 타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 ‘ㅁ’ 시가 이 소설의 배경이다. ‘ㅁ’ 시의 ‘발전’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어째 비즈니스맨임을 자처하는 시장의 몫이 절대적이라는 느낌이다. 그것은 그가 비즈니스라는 독버섯을 설파하고 다니는 한 사람을 넘어서서, 비즈니스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그러니까 ‘비즈니스’가 군림하는 ‘ㅁ’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과 노골적으로 닮아 있다. 신시가지와 구 시가지를 나누는 황강. 구시가지 사람들은 그 황강에 놓인 ‘신세기대교’라고 이름 붙여진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출근을 한다. 파출부, 청소원, 짐꾼, 대리운전자, 일용직 노동자 등. 그들은 신시가지의 빌딩 숲 사이를 오가며 신시가지 사람들의 허드렛일을 거든다. 그리고 그들의 고향에는 신시가지 사람들의 쓰레기를 실은 차들만이 공허하게 오간다. ‘짐승의 마을’ 이라고 불리는 구시가지는 그렇게 신시가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마을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구시가지 사람들에게 가난과 소외로 인한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을 주었다. 신시가지 사람들처럼 되겠다는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이 아들인 정우의 교육을 위해 매춘까지 하게 되는 데에는 바로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 따라잡지 않으면, 구 시가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남들만큼 돈을 쏟아 붓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찾아 올 가난의 되물림에 자식으로부터 원망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누구나 신시가지 혹은 구 시가지에 속해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지리적인 개념인 경우도 있지만 금전적이거나, 정서적인 개념일수도 있다. 그리고 신시가지와 구 시가지를 나누는 경계가 어떤 것이건 간에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인류가 존재하는 한 본질적으로 그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비즈니스가 사회를 살아가는 철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 철학이 바로 ‘ㅁ’시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도덕적 해이와 그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남편과, 자식으로부터 떨어져서 자폐를 앓는, 내연남의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면서도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이유도 그 우화적 구조에서나마 비즈니스의 굴레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책을 덮는 순간 문득 주인공이 부러워졌다. 대한민국은 비즈니스맨을 자처하는 시장이 군림하는 사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비즈니스라는 시장을 쓰러트리고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사리 비즈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독히 현실적이고 노골적인 이 소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