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고은 시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전에 없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자 대한민국은 술렁였다. 그러나 결과는 또 한 번의 수상 실패였고, 사람들은 저마다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실망과 함께 한국 문학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한글의 우수성을 국수적인 관점에서 강조할 뿐 세계화에 대한 노력에는 소홀하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번역가를 양성해 2만종에 가까운 번역물을 펴낸 일본과의 비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문은 본질적인 문제를 빗겨갔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는 왜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가?’ 가 아니라 ‘과연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꼭 받아야 하는가?’ 이다.

노벨 문학상은 절대 반지?

노벨 문학상에는 언어적 한계가 작용한다.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유럽, 남미 쪽 작가들이 많은데, 이들이 사용하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은 오래전부터 문화, 사상의 중요한 재료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세계 문화와 사상의 중심에 서 있던 언어로 쓰인 문학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어서 애써 불완전한 번역을 해야 하는 언어로 만들어진 문학 중에 어느 쪽이 더 그들의 관심을 끌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요컨대 노벨 문학상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문학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은 문학계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의 다이너마이트처럼> 


물론 노벨 문학상은 하나의 ‘증거’이다. 우리 문학이 건강하게 살아 숨 쉬고 세계인과 호흡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이자,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국가적 영예로 여겨진다. 그러나 증거는 증거일 뿐이지 절대적인 우열을 가리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노벨 문학상을 한 번도 수상하지 못한 나라라고 해서 절대적인 문학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은 독자의 수준을 담는다.

물론 한국 문학이 위기라는 사실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큼 실력 있는 작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 문학이 정작 자국의 독자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출판 업계의 베스트셀러는 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리고 일본 작가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출판 업계에서는 ‘한국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진 일본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하면 필승이다’ 는 말까지 돈다.

이렇게 된 원인을 따지기 위해 문단이 문제냐, 독자가 문제냐 하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추세가 한국 문학의 다양성이나 발전을 저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소설가 황석영은 이에 대해 ‘대중에게 게을렀던 문인들의 잘못’ 이라고 반성함과 동시에 ‘독자들도 문학적 가치를 살피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파울로 코엘료 등의 해외 베스트 셀러 작가들이 나름의 문학관을 가진 뛰어난 작가들인 것은 맞지만, 한국 독자들이 이 작가들의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 ‘문학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들이 읽으니까, 뒤쳐지기 싫으니까’ 읽는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상식과 교양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잖은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문학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입에서 우리 문학의 체질 개선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 문학의 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2월 현재 각 서점의 베스트 셀러 목록. 한국 소설이 설 자리는 없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을 수 있다. ‘읽어봤는데 정말 별로다, 수준이 떨어져서 못 읽겠다. 한국 문학 다 거기서 거기더라. 싸구려 주제 의식에, 철학이 없다.’ 고 말이다. 그러나 문학의 수준은 언제나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취향, 그리고 지적 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 문학에 대한 질책에 열을 올리기 전에 꼭 한 가지 기억해 둘 사실이 있다. 그것을 바로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문학을 가진다.’ 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