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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 금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


지난해 7월 교육현장뿐만 아니라 이미 학교를 떠난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체벌전면금지 조치 선언이었다. 모든 국민이 최소 9년의 의무교육을 받는 현재 상황에서,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나 이미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체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득 그 이미지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지 궁금하다. 그것은 훌륭한 교육적 수단으로 기능한 사랑의 매였을까? 아니면 그저 아프기만 한 고통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교육적 수단을 가장한 폭력이었을까?     

곽 교육감의 ‘체벌전면금지’ 조치 이후 체벌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들이 있어왔다. 이러한 담론들은 크게 체벌금지 찬성과 반대의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그 중에 주목할 만한 대표적인 두 개의 입장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의 체벌금지 찬성론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교총)의 체벌금지 반대론이다. 그런데 하나의 주제에 대한 양측의 주장은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한 갈등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왜 체벌금지에 대한 논의는 결론을 맺지 못한 채 이렇게 빙빙 도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주장의 핵심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체벌금지를 찬성하는 전교조는 주장의 핵심 근거로 학생권을 들고 있다. 체벌이 학생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교총의 주장은 전교조와는 정반대 격의 근거로 무장하고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교권이다. 체벌이 금지될 때 교권이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양측은 체벌금지 찬성 입장과 반대 입장으로 나뉘어 서로 충돌하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 근거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학생권의 옹호와 교권의 옹호라는 것이 말이다. 다시 이들 주장을 정리해보면 결국 전교조의 주장과 교총의 주장은 교권 대 학생권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분명히 이 둘은 하나의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인데, 각자의 주장들은 접점을 보이지 않고 역으로 학생권과 교권을 대립되는 두 개의 권리로 상정하고 있다. 이는 같은 문제에 대해 양측이 무작정 서로 다른 생각을 펼쳐나가기 때문이다. 교총이 교권 수호를 목적으로 체벌금지반대를 외치는 것은 학생권을 침해할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전교조 역시 체벌금지를 통한 학생권의 보호가 교권의 침해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총과 전교조 모두 각자의 가설만을 신봉하고 상대방의 가설을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여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논의는 좁혀지지 않으며 외견 상 두 주장이 학생권과 교권의 대립으로마저 읽히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논의가 진전을 보이지 않고 현 상태를 유지하며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된다면, 교육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가 체벌 담론의 주인공인 학생과 교사에게 주입될 경우, 장차 더 큰 문제가 파생될 수 있다.

전교조와 교총의 체벌금지담론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결과를 파생시킨 데는 이러한 소통의 부재가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체벌에 대한 숙고(熟考)가 부족한 것이 더 큰 원인이다. 숙고없는 논의에서 이들의 주장은 교권과 학생권이 충돌하는 것인 마냥 왜곡되어 표현된다. 이들 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도 전교조가 체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교총이 체벌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똑같은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상 이들은 체벌에 대해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고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위 그림은 18세기 조선의 화가 김홍도가 그린 <서당>이라는 그림이다. 한 아이가 숙제를 해오지 않아 훈장님께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뒤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 때의 체벌을 생각해보자. 학생은 숙제를 해오지 않은 잘못을 했고 훈장은 맞아도 비교적 모멸감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신체부위인 종아리에 회초리로 아픔을 가하여 숙제를 해오지 않은 제자에게 체벌을 했다. 제자는 이 아픔을 기억하여 다음번엔 숙제를 꼭 해올 것만 같다. 교총이 체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이에 가깝다. 제자가 잘못을 했을 때 스승은 머리나 그밖에 다른 모멸감을 느낄 만한 신체부위를 그때그때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마구잡이식으로 체벌하지 않는다. 체벌은 일정한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잘못을 했다고 생각되는 제자에게 훈육의 도구로서 상징되는 회초리로 맞아도 정신적 상처를 입지 않을 만한 종아리를 때리는 것이 바로 그 틀이다. 이러한 체벌의 모습에서 교권으로 인해 침해되는 학생권을 떠올리기 힘들다.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체벌의 룰 속에는 분명한 교육 철학이 담겨 있다.   


반대되는 사례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체벌 장면을 참고해 보자. 선생은 야구 방망이를 들고 무차별한 세기로 지각한 학생들의 엉덩이를 내리친다. 그러나 이 체벌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형태의 체벌들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다. 이 영화에는 야한 잡지를 본 학생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서 학생의 입에 야한 잡지를 한 장 한 장 찢어서 입에 넣게 한 다음 부풀어 오른 양 볼을 양 손으로 철썩 철썩 때리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학생을 캐비닛 안에 넣고 사정없이 발로 차는 장면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체벌은 어떠한 교육 철학도 포함하지 않으며 학생의 인권에 대한 고려를 하고 있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김홍도의 <서당>의 회초리 체벌에서부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하는 정말 잔혹한 체벌에 이르기까지 체벌의 스펙트럼은 실로 넓다. 그러나 교총이 체벌이라는 단어를 듣고 김홍도의 <서당>에서의 바람직한 체벌을 떠올리는 반면, 전교조는 체벌의 스펙트럼 자체에 관심이 없으며 어떤 종류의 체벌이건 다 똑같이 ‘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인간을 때려서 교육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체벌은 학생의 인권을 위협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체벌의 이미지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다.

이들이 체벌을 얘기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들의 논의는 좀처럼 좁혀질 수 없다. 이 상태에서 논의가 계속될 경우 갈등만이 조장될 뿐이며, 체벌문제에 대한 숙의는 요원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의 체벌을 떠올려보자. 교총이 떠올리는 이미지를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실제로 체벌은 ‘사랑의 매’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을 때림으로써 교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믿는 모든 체벌을 부정적으로 보는 전교조의 교육 철학을 그저 숭고한 이상일 뿐이라며 배척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그럴 수 없다. 전교조의 교육 철학은 학생의 인권의 측면이나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의 측면에서도 우리의 지향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각 학교에서 현재 자행되고 있는 체벌의 행위는 실로 다양할 수 있다. ‘체벌’이라는 한 단어 속에 양 측이 생각하는 이미지만을 투영할 것이 아니라 양 측은 학교 현장에서 체벌이 이루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체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고, 양측은 서로 의견을 좁힐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야 이들은 같은 주제에 대해 깊이 논의 할 수 있을 것이며 더 이상 빙빙 도는 논의가 아닌 체벌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고함20
고함20

20대의 소란한 공존 [고함20]의 대표 계정입니다.

2 Comments
  1. 노지

    2011년 2월 5일 00:03

    그저 이렇게 금지만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시 체벌을 느끼게 되겠지요

  2. thfflf

    2011년 2월 25일 04:28

    글세요. 그건 이걸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요. 유럽쪽에서 회초리를 사용한다는 말을 들어본적도 없으니…
    회초리를 안쓰는 사례도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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