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잔인한 살해 장면이 나오는 전쟁 영화를 볼 때, 심지어 폭력적인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볼 때, 대부분은 얼굴을 찡그리거나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는 등 잔인한 일을 당하는 대상의 아픔을 느끼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 실제로 그 일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실감난다’, ‘그 사람의 아픔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눈물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고 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정말로 다큐멘터리 속 인물의 아픔과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엄밀히 그리고 냉정히 말하면 그 인물과 나는 동일 인물이 아니고, 서로 다른 객체이고,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났을 뿐인데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눈을 찡그리고 귀를 막으면서도 찡그린 눈 사이로, 귀를 막은 손가락 사이로 영상 속의 고통이 전달될 때의 쾌감을 느낀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하나도 안 무서워’라고 말하며 끔찍한 이미지를 태연하게 쳐다볼 수 있는 것도, 끔찍한 이미지를 보며 몸을 움찔거리거나 눈을 찡그리는 것도 모두 쾌락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는 모두 관음증 환자다. 전쟁 사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감상하는 사람도, 결코 피사체의 고통을 공감하고 공유할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찍는 사람의 의도는 전혀 순수하지 못하며, 감상하는 사람도 관음증 환자가 되어 사진을 쾌감으로 대한다.

 

수전 손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름끼치는 전쟁 사진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이야기한다.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갇혀 있었던 캄보디아인들, 몇 분 후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두 손은 등 뒤로 묶인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그들을 담은 엠 에인의 사진은 너무나도 끔찍하다.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진 속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며 ‘영원히’ 살해당하기 일보 직전에 놓여있고 ‘영원히’ 학대받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대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전쟁은 무시하고 있으며 더욱이 사진은 이를 짓밟고 있다.

포토 저널리즘의 오랜 관행은, 장소적 배경이 이국적이고 서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희생자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손택은, 죽는 순간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뜬 시체나 사지가 잘리는 등의 자극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사진은 부당한 고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러한 고통은 ‘그런 미개한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라는 메세지를 남긴다고 설명한다. ‘보여지는 자’가 백인이 아닌 이국인일 경우 그들이 잔혹한 폭력을 당하는 모습은 아무렇지 않게 전시된다. 그 르완다 군인, 그 탈레반 병사에게도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찍는 자’와 ‘보는 자’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는 것이다.

 

엠 에인, <툴술렝 감옥> 1975~1979.

이러한 것들은 만약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공감 능력이 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확실히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느끼는 아픔을 함께할 수 없다. 사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는 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수전 손택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현대인이 갖는 기본적인 ‘인류에 대한 애정’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웃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재앙을 바라보았는가, 공감했는가? 지구 반대편의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했는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오늘도 무심코 신문을 넘기며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당신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물어보는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