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사태의 여파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현재 일본은 각지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만 수만명을 헤아리는 가운데 미쳐 수습 하지 못한 시신과 파괴된 시설물들로 지옥을 방불케 한다.

각국에서 구조대가 파견되고 경제적 지원도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마지못한 지원이 아니다.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국민들의 성금 모금 열기도 그렇거니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파견된 대한민국 구조대는 방사능에 피폭에 대한 위험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국가의 구조대가 철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구조 활동을 펼쳤다. 더군다나 정부는 각국이 일찌감치 일본 내 자국 국민의 철수를 종용한 것과 달리, 한국은 끝까지 일본 내 사정을 고려하다가 뒤늦게야 행동에 나섰고 그마저도 “미국과 영국의 기준을 준용하겠다.” 며 대피 권고에 나섰다. ‘준용’이라 함은 ‘그대로 좇아서 쓰다’ 라는 뜻인데, 자국민의 안전에 대한 선택을 주체적인 판단 없이 혹시 모르니까 남 따라서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를 두고 말이 많다. 천문학적인 손해를 불러일으킨 구제역의 불길이 채 잡히지도 않았는데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풍족한 일본에게 과도한 성의 표시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에서부터, 지원을 받는 데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거슬린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대체 왜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자국 국민의 안전까지 포기해야 하냐는 것이다.

이렇듯 최인접 국가의 불운에 대해서도 쿨하게 도와줄 수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 내부사정이 ‘내 코가 석자’ 이기도 하고, 그 도움이라는 것이 자국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여서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역사의 악연에서 기인한 한일 관계의 끊임없는 질곡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습이 끝나면 또 다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것’이며, ‘우익 역사 교과서는 당장 내년에도 또 편찬 될 것’이라는 것. 우리가 아무리 호의를 표시해봤자 근본적으로 일본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곤란하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

사실 우리는 그렇게 속 좁은 민족이 아니다. 우리의 민족 정서라고 할 수 있는 ‘한’이라는 것은 ‘원한’과는 구분되는 말이다. ‘한’이라는 것은 분노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복수 할 일도 없다. 실제로 일제 식민 통치가 끝나는 그 날도 수많은 일본인들을 무사히 보내줬다.

그러나 2011년 대한민국은 그렇게 의연할 수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 정부의 대일본 외교 정책이 너무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크게 한 몫 한다. 

2009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일본 총리 후쿠다 야스오와의 정상 회담에서 “다케시마 (독도의 일본측 명칭)를 교과서에 쓰지 않을 수 없다.” 는 후쿠다 총리의 말에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는 말을 했다는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가 전해졌다. 이에 대한 진위 논란으로 소송까지 진행되었지만 어느 쪽 주장이 사실인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 한 마디로 한일 외교 관계는 대일 외교에 있어서 대놓고 강경책을 폈던 노무현 정권 때보다 더한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진위 여부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추측에 추측을 더해 현 정부가 대일본 굴욕 외교를 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대일본 외교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밑지고 있다는 의혹이 만든 것은 지난 100년간 한국인을 인식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에 대한 패배감이다. 찍어 누를수록 고개를 뻣뻣하게 쳐드는 한국인의 정서상, 차라리 대놓고 할 말 다 하며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전 정권 때와는 달리 일본에게 마냥 쿨할 수만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일본 천황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명박 대통령. 대통령이 표현하는 예의와 존경심은
한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국가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이 사진 한 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대일본 굴욕 외교의 상징으로 확대 해석하는 이유이다.

국제 관계에 섣불리 감정을 내세우지 말라

그러나 어찌됐건 우리는 이미 일본에게 상당히 많은 지원을 했다. 국제 사회의 찬사를 받을 수 있을만한 구조대의 활약과 자발적인 국내의 성금 모금 운동 등은 두 나라의 관계를 아는 외국 언론에게도 놀랍게 여겨질 정도이다.
 

 
감정을 추스르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쩌면 쏟아 부은 노력보다 더 큰 것을 얻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일본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인 지원은 일본 복구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당장 우리나라 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의 액수도 아니다. 그러나 명분 면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국제 사회의 많은 도움을 받은 나라임에도 지원에는 인색하다는 평가를 불식시켜나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이는 평소에 우리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인다고 해서 꼭 얻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것들이다. G20과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우리의 국격과 가치를 과연 얼마나 높였는가 생각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물론 구조대와 교민의 안전 문제와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물질 낙진의 문제 등 아직도 우리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러나 기왕 투자해서 얻어 낸 성과를 우리 손으로 백지화 시킬 것은 없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일본은 한국 전쟁을 기회로 2차 세계 대전으로 쑥밭이 된 나라의 기반을 닦았다.

일본에게 인간 이하의 고통과 수모를 겪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정기 집회인 ‘수요 시위’는 지난 19년간 계속 되었다. 이 슬픔과 분노의 자리에 지난 16일부터는 시위 대신에 추모 집회가 열렸고 할머니들이 직접 성금을 내기도 했다. 당장 사태가 수습되고 나면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전과 다름없이 차갑게 대하겠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국제 사회는 철없이 뛰어 노는 손자, 혼낼 때 혼내더라도, 까진 무릎에 약이라도 발라주고 혼내자고 말하는 듯한 한국인의 의연함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