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3일, G20 회의의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 넣은 혐의로 구속된 박정수씨의 판결이 내려졌다. 벌금 200만원 선고.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정부를 비판하고자 했던 한 인문학자의 대담한 시도는 끝내 사법부의 ‘응징’을 받게 되었다. 무려 대검찰청 공안부에서 수사를 지휘했고, 애초에 공판 검사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구형한 형량은 징역 10개월이었다.

쥐 그림이 G20회의의 진행에 방해가 된 것도 아니다.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의 총 손실액은 50만원에 불과하다.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이 사건에 사법부가 눈을 뒤집고 달려든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번영과 밝은 미래를 향한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포스터에 불길한 동물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하필 그 동물이 저 높은 곳에 계신 누군가를 향한 풍자적 묘사에 애용되는 쥐였기 때문에? 검사는 법정에서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죄”를 열띤 목소리로 주장했다고 한다. 이 희극적인 발언은 정부의 숭고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료들의 충성을 민망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공공물 훼손이니 국가 이미지 실추니 하는 것들은 구실에 불과하다. 박씨는 정부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철퇴를 맞은 것이다. 과도한 액션을 취함으로써 다른 시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게다. ‘함부로 행동하면 이렇게 된다. 알아서 조심해라.’
 

박정수씨가 그린 쥐 그림

 포스터에 쥐 대신 개나 코끼리를 그려 넣었으면 어땠을까? 최소한 ‘특정인에 대한 비방’이라는 혐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 터다. ‘불길한 동물’을 그림으로써 포스터가 추구하는 가치를 훼손했다는 식의 주장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200만원형보다는 훨씬 가벼운 판결이 내려졌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호랑이를 그렸다면 ‘국가 번영을 향한 웅대한 포부와 기개’를 표현했다면서 서울시로부터 표창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린 그림이 하필 쥐였기 때문에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는 해석은 우울하다. “예술적 표현의 자유는 무제한적으로 보장받는다고 할 수 없다”는 재판부의 주장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22일 국제신문 칼럼에 인상 깊은 일화가 소개되었다. 1830년 프랑스의 한 정치풍자 잡지에 ‘라 프와르’라는 제목의 만화가 실렸다. 왕의 얼굴이 점점 배로 변해가는 그림이었다. ‘라 프와르’는 배라는 뜻도 있지만 바보, 얼간이라는 의미도 된다. 격노한 왕은 모든 잡지를 사들이라고 명령했고, 작가인 샤를 필리퐁은 즉각 체포되어 ‘왕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배 그림이 죄가 된다면 정부는 배 모양으로 생긴 모든 것을 체포해야 한다”며 항변했지만 판결은 가혹했다. 그는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시민들이 제작한 '쥐벽티'

180년 전 왕정 국가에서 일어났던 일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2011년 대한민국에서 비슷한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정부를 향한 시민의 자유로운 비판과 풍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경직된 분위기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위정자들이 유머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민을 통치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시대착오적 망상에 빠져 있기 때문인가. 전자라면 안타깝고, 후자라면 두렵다.

180년 전 프랑스에서는 배 모양 장난감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단다. 올 여름 대한민국에서는 불길한 쥐 그림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갈 예정이다. 쥐 그림 공판 이후 시민 사회 곳곳에서 2차적인 패러디 운동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고 있다. 탤런트 김여진씨는 트위터를 통해 쥐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인 일명 ‘쥐벽티’를 제작, 판매하는 운동을 조직했다. 티셔츠 판매액으로 박씨의 벌금을 충당하자는 것이다. 홍익대 일일주점 ‘청사초롱’에서는 쥐 포스터를 직접 그려서 가져가는 행사가 열린다. 정부는 이 많은 쥐들을 무슨 수로 다 소탕할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