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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스토리를 갖다.

 천국의 계단의 김태희를 기억하는가? 천국의 계단을 본 사람이라면, 두 눈을 치켜 뜨고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최지우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듯한 김태희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할 것이다. 그런데, 그 중 김태희가 왜 악녀가 되었는지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한국 드라마에서 악녀는 마치 선악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태어날 때부터 악했을 것만 같은 인물로 그려지기 마련이었다. 이들이 왜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과감히 생략되었다. 악행을 저지르게 된 심리상태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아예 축약되거나, 기껏해야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애먼 주인공의 탓으로 돌리는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악녀의 역할은 오로지 하나, 여자 주인공의 착하디 착한 성격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브주연이다 보니 주인공에 비해 분량도 훨씬 적었고, 나오는 분량마저도 표독스럽게 주인공을 노려보거나 주인공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계략을 짜는 모습이 전부였다.
 


“나도 사연 있는 여자야!”

 그랬던 악녀가, 변하고 있다. 악녀가 “스토리”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악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하기만 한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악행을 저지를만한 나름의 이유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에 따라, 악녀로 향하는 심리적 변화는 극의 흐름을 떠받쳐 주는 하나의 중심 축이 되고 있다.

 요즘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주말 드라마 “반짝 반짝 빛나는”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한정원(김현주)은 부자인 부모 덕에 부족함 없이 밝고 바르게 자라왔지만, 가난한 부모 밑에서 힘들게 자란 황금란(이유리)은 내성적이고 세상에 비관적이다. 너무나도 다른 이 둘이 병원 측의 실수로 뒤바뀐 것이 드러나, 친부모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황금란은 부자인 친부모를 만나면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여전히 불행하다. 하지만, 한정원은 가난한 친부모 밑에 살게 되어도 여전히 꿋꿋하고 반짝 반짝 빛이 난다. 황금란은 원래 한정원이 겪어야 할 시련과 좌절을 자신이 다 겪었다는 생각에 한정원이 얄미웠는데, 언제 어디서든 씩씩한 정원이의 모습을 보니 열등감마저 생기기 시작한다. 정원이에 대한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으로 인해 금란이는 점점 더 악독한 캐릭터로 변해간다. 

 이처럼 악녀의 사연과 그로 인한 변화를 제시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 악녀가 맡는 역할의 비중 또한 커지고 있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주던 보조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서브 주연이 아닌 당당하게 주연자리를 꿰차기도 한다. 현재 방영 중인 MBC 드라마 “리플리”에서는 악녀가 주인공이다. 악녀의 입장에서 풀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악녀가 저지르는 악행은 시청자들이 다른 시각에서 드라마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악행이 착한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단편적인 행위로 보여지기 보다는, 이야기 흐름을 타고 나름의 근거와 발단, 절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악녀는 선한 역할을 돋보이게 해주는 부수적인 역할이 아니라, 자기만의 스토리와 자신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주연으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다. 


 






 높아진 시청자의 안목, 드라마에 작품성을 요구하다.

 이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낸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시청자들의 보는 눈이 높아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예전 한국 드라마는 스토리의 구조가 매우 단순한 경우가 많았다. 착하디 착한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악녀가 있다. 둘 사이의 명확한 선악 구도는 시청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고, 권선징악의 결말은 당시 드라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요즘의 시청자는 예전과 같지 않다. 결말이 눈에 보이는 뻔한 선악구도와 권선징악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면서, 선악구도와 권선징악이 일으킬 수 있는 단순한 재미 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제 스토리 전개와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조화하여 이뤄지는 드라마의 전체적인 작품성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시청자들의 높아진 안목에, 좀 더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다채로운 스토리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등장인물 내면의 변화를 다이나믹하게 그려내는 스토리도 각광받고 있다. 악녀가 되어가는 심리적 변화를 다룬 스토리는 다이나믹한 이야기 구성과 연기를 가능하게 하게 하는 스토리가 될 수 있다.

 드라마에 작품성이 요구됨과 동시에, 시청자의 역할 또한 달라졌다. 예전의 시청자가 주어진 스토리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면, 요즘의 시청자는 이야기를 직접 해석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청자의 역할을 원하고 있다. 그런 적극적인 시청자에게, 드라마의 첫 회를 볼 때부터 주어지는 선과 악의 구도는 구시대적으로 느껴진다. 시청자들은 캐릭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왜 그렇게 착할 수 밖에 없는지 또 왜 그렇게 악하게 되었는지 등장인물의 사연과 심리를 파악하며 드라마를 감상하고자 한다.




 


달라진 사회상, 드라마에 공감을 요구하다

 시청자가 드라마를 볼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중 하나가 “공감”의 여부다. 달라진 사회 분위기는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폭을 확장시켰다. 요즘의 사회적 분위기는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감정들, 질투심과 분노, 좌절감과 열등감을 인정하고 또 표현하는 데에 개방적이다. 시청자들 또한 그 동안 표현하기 꺼려하던 인간적인 감정들에 솔직해지면서, 악녀의 감정과 행동이 시청자들에게 이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어떤 시련이 와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고 희망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핵심 원리가 ‘경쟁’이 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마음과 어느 정도의 약삭빠름이 필요해졌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착하기만 해서는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화한 사회상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심리 변화는 드라마에 고스란히 반영이 되어 캐릭터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시청자의 감정이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보다 현실적인 캐릭터를 드라마에 등장시킨 것이다. 착하디 착한 본성으로 인해 자기 몫의 이익을 다 빼앗겨버리고 마는 캐릭터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기 어려워졌다. 대신에,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 솔직한 악한 캐릭터가 시청자의 감정이입을 이끌어내기 더 용이해졌다. 

 악녀의 진화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수많은 악녀들이 우리의 브라운관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보다 진솔한 그들이 쏟아낼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고함20
고함20

20대의 소란한 공존 [고함20]의 대표 계정입니다.

1 Comment
  1. 박혜연

    2011년 12월 24일 15:58

    옛날드라마나 만화들을 보면 악녀들은 전부 태어날때부터 완전한 악녀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현재는 사연있는 악녀들이 더더욱이 많더라구요? 대부분 불우하게 자랐거나 아니면 애정결핍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피해의식을 갖게되어 착한여주인공들을 괴롭히는 악녀가 될수밖에 없는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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