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늦은 새벽, 홀로 TV 앞에 앉아 있다. TV 안에선 붉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뛰어다녔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인터넷 창을 연다.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평점이 올라온다. 평점을 확인하고 잠든다. 다음 날, 축구를 좋아하지만 새벽경기를 볼 체력은 없는 아버지가 묻는다. “어제 박지성 잘했니?”, “평점 7점이래요.”, “꽤 했네.”


나는 무심코 대답하고, 아버지도 알아들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웃긴 일이다. 90분간의 플레이가 ‘7점’ 두 글자로 압축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두 글자를 듣고 아버지가 단박에 ‘꽤 했네.’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니. 비단 우리 가족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골이나 도움 같은 특별한 활약상이 없는 이상, 언론의 보도도 뻔하다. 영국 언론이 매기는 점수를 기사 타이틀에 갖다 붙이고, 또 놀랍게도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도 박지성의 활약상을 알 수 있다.

매 경기, 이런 식으로 영국 언론은 평점을 매긴다.


앞에서 축구의 예를 들었지만, 평점 매기기는 축구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제 박지성 잘했니?”, “평점 7점이래요.” 라는 대화는 영화에도, 게임에도, 드라마에도, 도서에도 적용된다. “XXX 재밌어?” “어 그거 평점 9점 넘어.” 라는 식이다.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평점 열풍은 2005년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한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영국의 언론들은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끝난 후 선수에게 평점을 부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한국의 언론들은 그 평점을 기사화했다. 그렇게 축구로부터 시작된 점수 매기기 열풍은 다른 분야로 확산되어 나갔다. 포털사이트에서는 각종 문화 상품이 평점 혹은 별점이란 이름으로 점수화되고 있다. 전문가의 이름을 빌려 점수가 매겨질 때도 있고, 네티즌의 참여로만 점수가 정해질 때도 있다. 때론 두 방식이 혼용되기도 한다. 위의 방식 중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  평점 매기기는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을 평점 공화국이라 칭해도 좋을 정도로.

어떤 컨텐츠에 대한 네티즌의 평점.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평점 매기기는 사회변화에서 기인한다.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면서 모든 표현은 극단적으로 압축되고 있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우결’이 되고, ‘나는 가수다’는 ‘나가수’가 된다. 80자 분량의 sms 와 140자 분량의 트위터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말을 줄이고, 또 줄인다. 그런 현대 사회에서 ‘몇 점’ 이라는 두 글자로, 어떤 상품의 내용을 압축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적으로 경제적이다. 게다가 현대는 영화, 드라마, 도서 등 모든 문화 상품이 과잉 공급되는 사회다. 때문에 평점은 소비자가 수많은 상품들 중 하나를 선택할 때 실패의 위험성을 줄여준다. 일단 9점 이상의 영화, 도서를 선택하기만 하면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평점을 매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평점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평가하는 행위는 현대인의 본능에 가깝다. 대부분의 평점(혹은 별점)은 소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비자들은 본인이 구매했던 상품에 대해 점수를 매길 수 있어 능동적 소비가 가능해졌고, 한편으론 그들의 평가욕을 채울 수 있다. 평점을 마냥 비판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평점은 지나치게 확산됐다. 평점이 매겨지고 있는 상품의 범위도 확산되었거니와,  평점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 또한 확산됐다. 어느 상품에 대해 평점을 매길 수 있다는 것은 그 상품을 ‘평가’ 할 수 있고, 또 그 평가를 ‘점수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평점을 매기고 있는 것은 대부분 문화나 예술 분야의 상품들이다. 과연 이 분야의 상품을 어떤 ‘수치’로서 평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두 글자로 그 상품의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는가. 앞에서 평점이 소비자의 실패 가능성을 줄여 준다고 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평점이 소비자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는 평점이 높은 상품을 선택함으로써 실패위험을 줄이고자 하지만, 결국 그것은 평점으로 인해 선택에 제한을 받는다는 뜻이다. 평점으로 인해 남들이 추천한, 그래서 후회하지 않을 상품을 선택할 확률은 늘어난 반면, 자신만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선택할 확률은 줄어든 것이다.


또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 하더라도 결코 수치화시킬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우정이나 애정을 수치화시킬 수 없다. 누군가의 인품이나 매력도 수치화시킬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평점 매기기 현상이 확산되며 이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입술이 맛있고, 다리가 멋지다. 그리고 머릿결이 날린다. 그래서 10점 만점에 10점이다. 2pm의 노래 ‘10점 만점에 10점’ 은 평점 매기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여자의 매력이 10점이란 건지, 여자의 외모가 10점이란 건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노래가 발표된 이후 ‘10점 만점에 10점’ 은 하나의 어구처럼 굳어져, 수많은 기사에 인용됐다. 고작 노래 가사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주변에서 이성의 외모를 점수로 평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외모, 얼굴을 평가한다는 신조어인 외평, 얼평 등의 단어가 이를 보여준다. 점수를 매길 수 없는, 또는 매겨선 안 되는 것까지 평점이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도 점수화시키는 평점 공화국, 이 사회는 몇 점짜리 사회인가.


평점은 필요악이다. 문화 상품을 함부로 점수화시키는 것은 위험하지만, 한편으론 불가피한 일이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상품에 대해 평가기준과 평가를 요구하고, 그것은 문화 상품이나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평점이 만능화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스포츠에서 시작된 한국 사회의 점수 매기기는 영화, 도서 등의 문화 상품으로 넘어왔고, 이제 외모, 매력 등의 ‘금단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 박지성의 평점은, 처음에는 단순한 참고사항이나 재미 위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지금 평점은 박지성의 활약을 나타내는 절대적 척도로 보도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점수 매기기 역시 마찬가지 경로를 따라갈까 무섭다. 언젠가는 ‘쟤는 5점밖에 안 되는 애야’ 라는 대화가 일상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서로가 서로를 점수 매기는 사회는 대체 몇 점짜리 사회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