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적 이슈가 별로 없던 노르웨이가 초유의 테러사건으로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노르웨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제대로 된 보도나 분석이 나오지 않고 각 신문들의 논지를 강화하는 형태로만 이 사건을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직 노르웨이 오슬로에 산지는 6개월이 되었고, 현재는 여름방학을 맞아 런던에 체류 중이지만 개방성과 공정성으로 대표되는 노르웨이 인들의 사고에 감동받아 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과 분석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충격을 추스르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앞서 전했던 국내 언론의 오보 소식은 긴박히 보도할 필요성을 느껴 먼저 발행 하였고, 앞으로 다섯 편 가량의 글을 통해 이번 테러 사건을 바탕으로 한 노르웨이와 우리나라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고함20 노르웨이 특파원 히아)


노르웨이 특파원이 전하는 노르웨이 ①

노르웨이 내의 이민자 갈등 진단: 북유럽 신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노르웨이 폭탄테러 소식이 전해지자, 내 페이스북 뉴스피드는 ‘Why Norway?’(왜 노르웨이에?)라는 글로 가득 찼다. 노르웨이는 아프간에 특수부대를 두 차례 파병한 것을 제외하고는 무슬림들의 타겟이 될 이유가 없는, 이민자 정책도 개방적인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 교환학생으로 오슬로에 지내면서 이 나라의 사람과 시스템에 감동받은 여러 나라 학생들에게, 이 나라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번 테러가 이슬람 테러집단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추측된다는 보도가 나오자, 노르웨이 친구들과 나는 노르웨이인들의 이민자 대한 태도가 냉랭해 질 지 모른다는 우려와 세를 키워나고 있는 극우정당인 ‘진보당’이 다음 선거에서 집권할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테러 용의자가 30대의 노르웨이 청년이라는 속보가 전해지자 우리는 테러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놀랐다.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 ‘인종주의자’ 등등 그를 묘사하는 모든 단어들이 노르웨이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인종 갈등이 적은 노르웨이: 국내 언론들의 분석오류들

브레이비크의 출연 배경으로 노동시장 잠식과 경제침체를 이유로 드는 언론들이 많지만 노르웨이의 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노르웨이는 영토나 산업 규모에 비해 인구가 부족해 실업률이 언제나 EU평균을 밑도는 나라다. 노르웨이가 이민자 정책을 장려하는데는 개방성이라는 사상적 기반도 있지만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세계적 경제 침체 속에서도 석유생산으로 나홀로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부자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침체 가운데 일자리를 뺏기고 있다는 불안이 노르웨이에서 인종주의자들을 낳고 있다는 지적은 전반적으로 맞다고 볼 수 없다.(다른 언론들은 스웨덴의 사례를 잘못 보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민자들이 노르웨이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도 사실과는 다르다. 노르웨이 경찰의 초동대처 미흡을 지적하면서 밝혀졌듯, 강력 범죄가 전혀 없는 노르웨이는 경찰들이 무기도 소지하지 않는 나라다. 이민자들의 범죄율이 높아서 불만을 사고 있을 정도라면 경찰이 이렇게 안이할 수는 없다. 오슬로에서 경찰에 전화하니 지금은 업무시간이 아니라 내일 전화하라고 대답했다는 에피소드는 흔한 이야기다.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복지국가의 무상교육 덕택에 다른 노르웨이 아이들과 비슷한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문직에도 대다수 포진해 있다. 직업의 귀하고 천함이 그리 강하지 않은 노르웨이인들은 굳이 전문직을 가지려 노력하지 않지만, 이민자들은 자신의 자식이 더 좋은 직업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민자들도 노르웨이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프간 파병 이후 테러 단체들의 위협이 있기는 하지만, 현지인들이 아닌 테러 단체의 위협과 단순 무슬림 이민자들을 묶을 연결고리는 약하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인종갈등이 외부로는 표출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상세계에 가까운 나라 노르웨이지만

그렇다면 인종 갈등이 드러나지 않고 차별이 적기로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에서 브레이비크와 같은 사람이 등장한 것은 왜일까. 시스템과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사람들은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국제 사회에서 힘이 강한 나라도 아니고, 대단한 문화적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북유럽의 개방성, 공정성, 성적 자유와 사회적 실험을 믿고 존중하는 사회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힘이나 국제적 지위는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지만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적 공감대는 한 순간에 생기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 살고 노르웨이에 대해 공부하면서 법안과 제도에 평등과 공정함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려 애쓴 흔적을 발견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북유럽이 개방과 공정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라고 해서, 이런 이상과 시스템이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아니다. 북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외국인에 대해서 공정하려고 노력하지만 동시에 심정적으로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기도 한다.

스웨덴의 도시 이스타드를 배경으로 한 BBC 추리 드라마 <왈랜더>의 한 에피소드에서 이러한 모습을 잘 그려낸다.

BBC드라마 <발란더>, 형사 발란더의 딸 린다와 남자친구 자말

형사 발란더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반적인 북유럽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살인사건의 범인이 외국인이라는 단서가 있지만, 이를 핑계로 극우주의자들의 마녀사냥이 시작 될 것을 우려하여 언론에 이를 보도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북유럽의 일반적 생각을 지닌 형사이다. 하지만 자신의 딸 린다가 새로 소개한 시리아 혈통의 의사 남자친구 ‘자말’을 보자, 마음속으로는 무언가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

“딸이 ‘자말’을 처음 데려 왔을 때, 내 마음 속에 무언가가 있었어. 지워버릴 수도 없고 떨쳐 버릴 수도 없었지. 이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한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아닌 내가. 북유럽에서 나고 자란 내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어쩌면,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이렇게 생각 할 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시스템과 사상이 옳다고 생각하고,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직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이를 받아들이지는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완전하지 못한 존재인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종 갈등은 적지만 통합에도 실패한 북유럽

어느 날, 학교에서 한 흑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그 흑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어디서 왔냐는 질문이 지겨워 미칠것 같아. 평생 이 질문을 듣고 살아왔어. 근데 난 노르웨이에서 왔다고.” 무척 재미있고 똑똑해서 인기가 많은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곳에서 북유럽 혈통이 아닌 사람이 산다는 것은 큰 스트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웨이가 이민자가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비서구권에서 온 이민자는 전체 인구의 6.1% 정도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적다. 게다가 다른 백인들과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금발과 훤칠한 키로 대표되는 특징적인 북유럽적 외모들 사이에서 비-북유럽 혈통의 사람들은 어디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노르웨이에 살면서도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매일 듣고 살며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외모는 하나의 단면일 뿐이다. 유럽 내에서도 서구적 합리주의가 극대화 되었다고 평가받는 노르웨이에서, 이민자들과의 큰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북유럽 방식을 계속 추구해야 하는 이유

하지만 북유럽사람들이 간혹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이민자들이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가진다거나 혹은 아르네스 베링 브레이빅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북유럽의 개방적 이민자 정책이 틀렸다거나, 알고 보면 이들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들이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들 보다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고, 이런 의식과 사상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구호에 그치지 않고 더욱 사람들 사이에서 체화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언론에서는 노르웨이 국제 문제 연구소 연구원의 인터뷰, “조금 더 ‘솔직’한 인정과 토론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통제 분위기가 브레이비크라는 극단주의자를 낳은 배경이다.”를 인용하여, 이상적이지 않은 의견을 배격하는 노르웨이의 현재에 대해 비판하는 논조들을 실었다. 하지만 ‘솔직하다’라는 이름 아래 모든 의견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가지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구성원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옳고 그름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노르웨이의 사회 정치적인 시스템이 브레이크비의 의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솔직한 인정’이란 말이 그럴듯해 보일 수는 있지만, 결국 평등과 이해하려는 노력을 버리고 차별과 몰이해를 슬로건으로 삼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브레이비크 같은 소수의 극단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아니라면, 노르웨이는 모두에게 충분히 행복한 나라다. 노르웨이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브레이비크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평균적인 생각이 자연스럽게 사회와 시스템에 반영되어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노르웨이이다. 물론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소수 의견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자명하지만, 매파의 주장이 있을 때마다 전쟁을 시작하는 건 바보짓임이 자명하다.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 이 나라 국민들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지만 브레이비크의 테러로 인해 시대를 역행하고 전체주의적 가치를 다시 신봉할 필요는 없다. 노르웨이 총리가 이야기 했듯 더 큰 ‘관용’과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대응하는 것이 노르웨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