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 당신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영화 ‘악인’의 타이틀이다. 사랑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두 사람의 사랑을 누가 용서하고 허락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사랑’ 대신 ‘이 사람’으로 바꾸면 영화 ‘악인’의 테마와 더 잘 어울리는 설명이 된다.

주인공인 유이치. 그는 무뚝뚝해 보이는 바닷가 청년이다. 인터넷 만남 사이트로 알게 된 요시노를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죽인다. 다음 날 유이치는 같은 만남 사이트에서 알게 된 다른 여자 미츠요와 만나 사랑하게 된다. 유이치는 자기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미츠요에게 말하고 자수하려 하지만 미츠요는 그를 말리고 둘은 등대로 도망친다. 하지만 결국 경찰에게 붙잡혀 버린다. 시간이 지나 미츠요는 요시노가 죽은 곳을 찾아갔지만 그 곳에서 요시노의 아버지를 보고 택시로 숨어버린다. 택시 기사는 그런 미츠요에게 살인범인 유이치를 ‘나쁜 녀석’이라 한다. 미츠요는 “예, 악인이죠…”로 말끝을 흐리며 영화는 막이 내린다.


완벽한 ‘악인’은 없다

살인범인 유이치. 그는 악인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를 악인이라 할 수 없다. 그는 어릴 적 등대에서 어머니께 버림 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상처가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의 차를 타는 요시노 앞에서 분노로 표출되어 버린 것이다. 이 분노로 시작된 사건이 살인으로 치닫는다.

유이치에게 살해당한 여자 요시노. 가장 억울한 입장으로 보이는 그녀도 어떤 면에서 보면 유이치에게 살인의 원인을 제공한 악인이다. 유이치를 사랑한 미츠요 역시 악의의 일을 했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유이치가 자수하지 못하게 말리는, 자신의 욕심을 위한 선택을 한다.

유이치의 할머니, 요시노의 아버지 역시 ‘악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는 아픈 할아버지를 병원에 두고 다른 할머니들과 모임에 나갔으며 요시노의 아버지는 요시노를 발로 차버린 마스오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 결국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단정하기 힘들다.

당신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감독은 피해자인 요시노에게 세속적인 모습을 투영하고 살인의 원인을 부여했다. 가해자 유이치의 살인은 우발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또 그의 사랑이 순수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유이치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만들지 않았다. 특히 유이치의 인간적인 모습은 영화가 끝이 나는 순간까지 부각된다. 이 둘의 모습은 일반적인 살인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모호함은 우리가 너무 쉽게 내려버리는 살인자에 대한 판단을 돌이켜 보게끔 한다.

극중 유이치. 그는 분명 범죄자이며 사회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살인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극에서 그는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의 상처를 가진 순수한 어촌의 청년이다. 경찰에게 붙잡히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잡으려 애쓰는 모습은 그에 대한 판단을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범죄자이지만 악인이 아닌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사회적 처벌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당신은 돌을 던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