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입장에서, 다듬어지지 않는 소설을 읽는 경험은 흔치 않다. 발표되었거나 출판된 소설들은 이미 수차례의 교정을 거친 상태이고, 그 교정들은 한 편의 글을 소설로서 ‘완벽하게’ 손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을 교정한다는 건, 가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언어는 이미 날 것이 아니게 되고, 때로는 글 안에 담긴 감정이나 생각조차 가공되는 경우도 있다.


조혁신의 『삼류가 간다』는 오랜만에 보는 ‘날 것 그대로의’ 소설이다. 언어의 이야기가 아니다. 글 안에 담겨 있는 감정과 생각들의 이야기다. 가공되지 않은 분노와 현실이 소설 안에 담겨 있다. 그 안에는 인간의 본성과 시대의 눈물, 그리고 속물의 변명들이 들어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삼류다. 지방신문의 해직기자, 막노동판의 일꾼, 노동자의 미망인 등. 잘 봐줘야 이 사회에서 하나의 톱니바퀴 정도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톱니바퀴도 소설 속 일부 인물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대부분 단편들의 주인공은 톱니바퀴도 아닌 사회의 ‘암적인 존재’ 이다. 남성에게 엉덩이를 내비치며, 또 작부의 사타구니에 성기를 들이밀며, 불법인줄 알면서도 신문 판매를 위해 경품을 증정하며, 그렇게 사는 ‘삼류’들이다.


그 삼류들의 삶은 본능의 삶이다. 또 저항의 삶이다. 소설 속 단편「달려라 자전거」의 주인공은 신문사 판매국에서 일한다. 그는 불법인줄 알면서도 ‘먹고살기’ 위해 자전거를 증정하고, 또 ‘먹고살기’ 위해 증정한 자전거를 다시 훔쳐온다. 먹고살기 위해 사는 삶이 본능이 아니고 무엇이랴. 또「마지막 담배 가게」의 주인공은 재개발을 위한 강제철거에 맞서 담배 가게를 지키는 사내에게 동조하고, 「황홀한 밤을 아는가」의 주인공은 신문사에 맞서 언론노조 활동을 벌인다. 권력에 맞서는 삶이 어찌 저항의 삶이 아니랴.


주인공들, 즉 ‘삼류’들의 삶을 본능과 저항으로 규정하자면, 필연적인 의문이 생긴다. 그들은 왜 먹고살기 위해 아옹다옹해야 했으며, 또 왜 ‘저항’해야 했는가라는 의문이다. 답은 간단하다. 먹고살기 힘드니 아옹다옹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있으니, 저항해야 한다. 마치 르포기사처럼, 소설은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를 통쾌하게 까발린다. 그 폭로는 용역업체에 의해 강제 철거되는 도시의 구석들(「마지막 담배 가게」)부터, 신문 판매를 위해 경품을 돌리는 일(「달려라 자전거」), 노동자를 아들로 둔 독거노인이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고물 냉장고」) 등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출처 : 아시아일보


첫 번째 의문, 즉 그들은 왜 ‘저항’해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이 ‘현실이 부조리해서’라면 필연적으로 두 번째 의문이 생긴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고 저항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삼류’로 지칭된다면 그 소설 속 사회는 과연 정상인가 하는 의문이다. 나아가 사회가 정상이 아니라면, 과연 정상이 아닌 사회에서 ‘삼류’로 지칭되는 이들이 진짜로 삼류인지의 문제다.


이 사람들이 삼류라면, 일류, 이류는 누구인가. 일본의 사회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는 그의 책에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이 들어오는 사람’만이 가난뱅이가 아니라 했다. 그럼 이런 사람이 일류인가. 그리고 우리같이 이런 소설을 돈 주고 사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류쯤 되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먹고살기 힘든 ‘삼류’를 낳는 사회는 그 자체가 ‘삼류사회’이다. ‘생존’의 문제가 모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하위 몇몇의 문제일 때 더욱 그러하다. 『삼류가 간다』에서의 사회가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 사회는 곧, 현실의 사회다. 또 우리의 사회다. 소설 속에서는 노동자 아들을 기다리다 쓸쓸히 죽음을 맞는 노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독거노인의 쓸쓸한 죽음이 이젠 이슈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 사회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런 사회에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좀 쳐보겠다는 소설 속 그들을, 그리고 현실의 그들을 과연 삼류라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부를 수는 없다. 우리가 사회에 찌들어 톱니바퀴로 변해가고 있을 때, 아니 톱니바퀴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삼류사회’를 지탱하는 조그만 기둥이 되어갈 때, 소설 속의 삼류들은 저항했다. 자그마한 톱니조차 되지 못해 저항했고, 인간이 톱니가 될 수 없다며 저항했다. 그런 그들을 삼류라 부를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조혁신의 『삼류가 간다』는 다분히 도발적이다. 정제되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이 현실의 무게와 함께 독자를 압박한다. 끊임없는 스트레이트다. 묘사는 원색적이고, 감정은 고양되어있다. 그 파편들을 읽으며 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다 보면, 소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마치 최승호 시인의 ‘북어’ 에서처럼. 삼류는 다름아닌 이 사회가 아니냐고. 네가 이 소설 속 ‘삼류’들을 감히 삼류라 부를 수 있느냐고. “너도 삼류지, 너도 삼류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