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언론에서 중동에 민주화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했던가? 튀니지의 시민혁명으로 시작한 중동의 민주화 바람은 주변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이집트 시민군이 무바라크를 지도자 자리에서 끌어 내린지 약 8개월 만인 지난 20일, 인근 국가인 리비아에서도 독재자 카다피를 권력에서 완전히 끌어내리는데 성공하였다. 40여 년 동안 측근들을 주요 요직에 임명하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왔고 최근엔 무자비한 시민들을 죽게 만든 카다피가 시민군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카다피의 사망으로 리비아의 과도정부(NTC)는 지난 23일 마침내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무자비한 독재자에게도 권력에 눈멀지 않았던, 깨어있는 지식인 청년이자 운동가였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 1 젊은 시절의 카다피


외세 추방에 나선 청년시절
 20세기 초반, 리비아는 30여년 동안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런 환경에서 카다피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다. 우리에겐 결코 굴복은 없다.” 라는 신념을 새기며 자란다. 1951년 드디어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했지만 왕은 영국정부의 꼭두각시였고 리비아의 대표적이고 막대한 재산인 석유는 제 값도 받지 못하고 외국으로 팔렸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자본은 대부분이 리비아 국민이 아닌 외국인들에게 흘러갔다. 이런 현실을 바꾸고자 1969년 리비아의 장교들은 쿠테타를 일으켰으며 그 중 한명이 바로 27살의 청년, 카다피였다. ‘반외세’로 정당성을 얻은 카다피의 정부는 영국군과 미군을 리비아에서 추방시켰으며 남아있던 이탈리아 인들의 재산을 몰수해 국고로 돌려놓았고, 국내의 은행들과 석유회사들 중 70%를 국유화 시켰다. 동시에 배럴당 2달러라는 형편없는 가격에 팔리던 석유의 가격은 카다피에 의해 1973~74년 사이 네 배로 올랐으며 이렇게 확충된 국고로 도로와 병원을 짓고 문맹퇴치를 위한 사업이 실시 되었다. 또 한편으로 대의민주주의를 정당의 권력획득에 집중되어 소모적인 시스템이라 비판하며, 이른바 제 3의 이론을 표방하고 이슬람종교의 율법과 민족주의를 토대로 하는 ‘아랍사회주의정당’이라는 단일정당을 만들었다. 이렇게 리비아에서 리비아 국민에 의한 자주국가가 설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부패하기 시작한 권력과 국제사회에서의 고립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아, 권력의 맛을 본 카다피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한다. 모든 정치활동은 하나의 정당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한을 두었으며(이외의 정당을 만드는 자는 참형에 처하였다.), 국민들의 참여를 위해 만든 기구인 기초인민회의에서 지역과 부족을 토대로 한 새로운 예비 권력자들이 떠오르려 하자 또 다른 기구를 만들어 기초인민회의를 무력화시켜버린다. 그리고 또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과 요구를 무시하고 파업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무시하는 등의 귀 닫은 정치를 계속해나간다. 

 안으로는 위처럼 통치를 한 카다피는 밖으로는 집권 초기부터 이어진 반외세적 성격의 외교는 물론이고 범-아랍국가 건설을 위한 외교를 해나갔다. 그런데 1967년 있었던 6일전쟁(이스라엘의 이집트 침략에 항의해 아랍인들이 영국과 미국 기업들의 재산을 공격한 사건. 아랍의 패색이 짙자 사그라졌다.) 이후로 사실상 중동의 분위기는 서양에 대한 적대적인 외교보단 실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집트까지 친미적 성격의 정부가 들어서고, 홀로 서양에 적대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는 리비아를 미국은 물론 좋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미국은 무력적 공격과 더불어 리비아를 고립시키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방편으로 카다피는 소련에 기대려 하였지만 소련의 기대에 못 미치는 지원과 붕괴로, 1990년대 초반 마침내 카다피의 리비아는 오랫동안 고집해온 반외세 입장을 버리고 각종 제제들을 풀고 실용을 추구해 나간다.


 사진2 카다피의 정치 철학을 담은 책 <그린 북>과 쓰러지는 <그린 북>의 모형

악화된 국민의 생활로 일어난 반란
 제제가 풀린 후, 자본이 있는 나라에서는 리비아의 석유를 보고 너도나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국적 기업들은 석유채굴권을 얻었고 석유와 교환된 자본은 리비아 국민들이 아닌, 카다피와 카디피의 측근들의 금고로 들어갔다. 1990년대부터 카다피 정권은 보건, 교육에 대한 예산을 크게 줄이고, 보조금제도와 실업수당을 폐지한 상태였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으로 일반 국민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카다피의 억압 통치에 눌리고 빈곤에 허덕이던 국민들은 무바라크가 무너지는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마침내 지난 2.17에 본격적인 저항에 불을 붙였고 8개월만에 독재자 카다피를 죽였다.

사진3, 4 카다피 죽음 이후 기뻐하는 시민들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우려되는 상황
 약 8개월 동안의 저항은 독재자를 내리고 시민군들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 까진 성공을 했다. 카다피와 측근들의 어마어마한 재산은 리비아의 재건에 쓰인다고 하며, 현지에서 찍힌 사진과 동영상들을 통해 아직 독재종식의 기쁨이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있다. 하지만 리비아엔 아직 해결해야 것들이 남았다. 리비아에 매장된 어마한 양의 석유로 인해, 주변에선 리비아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이집트에서 혁명이후로 치안이 엉망이 되어 각종 흉악범죄율이 늘어난 것 처럼 리비아 일반 시민들의 생활과 보복 행위 등 인권유린도 우려 된다. 그리고 가장 큰 우려는 내전발생이다. 다양한 배경(지역과, 부족별로 나눠진 세력과, 카다피 정권에서 예전에 이탈한 세력 등)의 시민군이 권력의 분배를 놓고 또 다시 피튀기는 내전을 일으켜 카다피의 죽음이 리비아의 새로운 시작이 아닌 권력에 눈먼 또 다른 카다피들을 잔뜩 생성해낸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까하는 우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