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계에 온전히 흡수되고 싶다

1시간 40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의 영화 <블라인드>. 절제된 영상과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는 더욱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북유럽 영화 특유의 신비로운 감성을 잘 담아 낸 영화는 200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연극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포스터”]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제작된 이 영화는 네덜란드 영화이다. 동화 <눈의 여왕>의 이야기는 영화의 중심부에 흐르고 있다. <눈의 여왕>의 카이와 게르다 그리고 그 사이의 거울의 존재는 영화의 핵심적인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카이, 너의 악마의 거울


어느 작은 도시에 카이라는 남자아이와 게르다라는 여자아이가 살았습니다. 둘은 아주 친한 친구여서 마주보는 다락방 장미 정원에서 함께 놀며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의 눈과 마음에 악마의 거울 조각이 박히고 맙니다. 그 날부터 카이는 못된 아이로 변해 갔습니다.


장면 중”]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루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남자 주인공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그는 외부를 완벽히 차단한다. 그가 사는 세계에는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후천적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그는 한 마리의 짐승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의욕 없는 몸짓, 비어있는 눈빛, 언제 드러날지 모르는 포악한 행동들. 철저한 어둠속에 혼자 있는 그의 ‘악마의 거울’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두려움. 이것이 루벤이 심지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조차 거부하는 이유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철저한 외로움 속에 존재하는 이유다. 그렇게 한 마리 길고양이처럼 그는 자신의 세계를 영위하고 있었다.


너의 게르다, 마리


게르다는 산적 소굴에 사는 비둘기로부터 카이가 눈의 여왕의 성에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게르다는 즉시 카이를 찾아 눈의 여왕의 성으로 떠납니다. 마침내 게르다는 카이를 만납니다.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에 카이 마음속에 박혔던 거울 조각마저 녹아내립니다. 카이가 게르다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카이 눈 속에 박혔던 거울 조각도 빠져 나옵니다


장면 중”]


영원할 것 같았던 루벤의 세계에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찾아온다. 루벤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고용된 여자, 얼굴을 비롯한 온 몸에 베인 상처가 있는 여자, 바로 마리이다.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온 마리를 루벤은 거부하지만 점차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다. 루벤은 점점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마리가 보여주는 세상에 다가간다.


마리와 함께하며 더 이상 루벤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감각으로 모든 것을 상상한다. ‘차가움’이라는 감촉을 마리라는 사람을 말이다. 그렇게 그의 ‘악마의 거울’은 녹아내린다.


다시 악마의 거울


게르다와 카이는 손을 잡고 옛날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느새 둘은 아이에서 숙녀와 청년으로 자라나 있습니다. 둘은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장면 중”]


루벤의 ‘악마의 거울’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의 ‘악마의 거울’이 둘 사이를 갈라 놓는다. 외모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마리는 수술로 루벤이 앞을 볼 수 있게 되면 자신의 얼굴을 보고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나 강한 자신의 ‘악마의 거울’을 깰 수 없었던 마리는 그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마리가 루벤의 ‘악마의 거울’을 녹인 것처럼 루벤도 마리의 ‘악마의 거울’을 녹인다. 마리가 알려 주었던 세상을 보는 방법으로 그녀를 다시 마주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각자의 방법으로 상대의 아픔을 보듬는다.


보이지 않는 너의 세계


마리와 루벤에게는 각자의 ‘악마의 거울’이 존재했다. 마리에게는 외모, 루벤에게는 두려움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악마의 거울’을 방치하지 않았다. 서로의 세계에 온전히 흡수 되면서 ‘악마의 거울’을 녹아냈다. 마리는 보이지 않는 루벤의 세계로 들어가 그에게 세상을 느끼게 해주고 루벤은 마리가 보여주었던 세상을 다시 마주하면서 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무엇인가? 당신의 ‘악마의 거울’은 무엇인가? 당신의 겉모습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