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책방 어느 한편에 자리한 시집을 외면하고 토익 책에 시선을 기울이고 있는 당신.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엔 지금 20대는 너무 바쁘다.
하지만 그 사이, 지금 갖고 있는 20대만의 감수성들을 안고 잠시 숨을 틔어보는 건 어떨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가 익히 들어 본 시의 작가, 김춘수의 시집으로 글을 써내가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풀이 문화’에는 한이 깃들여있다. 떠나간 이를 마지막까지 보듬어주고 다시 돌려보내는 것. 이런 일종의 장례행위는 김춘수의 시집 ‘거울 속에 비친 천사’에도 나타난다.
 

시인은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을 글로 승화시켜냈다. 
‘오늘은 또 슬픔이 하나/내 살 속을 파고 든다 /내 살 속은 너무 어두워/내 눈은 슬픔을 보지 못한다/내일은 부용꽃 피는/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슬픔이여’
‘슬픔이 하나’ 라는 시에서 시인은 자신만의 심정을 드러낸다. 살 속을 파고들만큼 아팠던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이렇듯 시집 구석구석 슬프게 묻어나있다. 

 降雨(강우)/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중략)

김춘수. 그의 시 세계는 관념과 대상 그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목적으로 해왔다. 지성이미지의 존재론적 시인으로서 그는 언어에서 의미를 비운다는 뜻의 무의미 시를 주되게 관찰했다. 하지만 이 시집에서의 시인, 그만의 모습은 달랐다. 사라져버린 아내의 모습과 메아리가 되어버린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보겠다고 외치는 일종의 고함과 같았다. 메마른 감수성 사이에 빗물을 뿌려주듯,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마 그의 출판목적이었을 법 하다.

 

그에게 천사란

천사라는 단어는 시인이 어릴 적 시인이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처음 들은 언어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릴케의 시 ‘천사’를 읽고 그는 두 번째로 천사를 만났다고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가 마주한 천사의 모습은 다름 아닌 사별한 아내의 모습이었다.
 

덧붙인 그의 후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내는 내 곁을 떠나자 천사가 됐다. 아내는 지금 나에게는 낯설고 신선하다. 아내는 지금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아내는 그런 천사다.’ 천사는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아픔이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시의 효용은 빵의 효용과 확연히 다르다는 표현을 들 수 있겠다. 빵이 절실히 요구될 때 시를 입에 넣어주는 일은 잔인하다.  그러나 예술이자 평화를 상징하는 시에서는 슬픔도 때로는 아름다움이 되어 버려야한다.
 

그에게 천사란 무엇일까. 실존주의 사상을 추구하던 화자에게 천사라는 단어는 인식 이후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그의 시 <꽃> 어느 구절처럼 시집에서나마 기억될 수 있는 부인의 모습. 그 자체가 결국 천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