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반대’의 남자다.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5공 청문회때부터 그의 가치는 언제나 기존의 권력에 ‘반(反)’하는 데 있었다. 반 지역주의, 반 권위주의, 반 4대 악법, 반 조중동.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작용하는 기존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반대와 해체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성과를 떠나 이 사회의 정의를 찾고자 했던 것에 의의가 있었다. 이명박 정권 들어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가 주목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존의 악습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국민들은 4년간 ‘몰상식’과 ‘부정의’를 체험하며 최소한의 상식과 휴머니즘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친노 열풍이 그 결과다. 이들은 ‘반MB’를 내세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반MB’나 노무현의 수많은 반(反)처럼 단순한 ’반대‘만으로 충분한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언가에 대한 반대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기존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만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내기는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문제의 대척점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점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원을 그리는 수많은 점들처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시도를 하는 것 자체로 의의가 있었던 노무현의 시대는 ’반대‘만으로도 의미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대‘가 아니라 ’어떤 반대‘인지가 더 중요해 졌다. ’반대‘ 이후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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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노무현이 시도했던 ’바로잡기‘ 방식은 기존 시스템을 보수 하는데 머물렀다. 대중들은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삶은 궁색했다. 그들은 이제 새 판을 원한다. 대기업이 빵과 떡볶이를 팔면 그것을 금지하는 수준의 정책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적 경쟁사회를 뛰어 넘는 새로운 시스템을 원한다. 아무런 검증도 받지 못한 안철수가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근본부터 바꾸는 새로운 시스템을 국민들이 열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노의 문제는 공유하는 가치와 비전이 없다는 것이다. ‘친노’의 핵심 인물들은 쉽게 열거할 수 있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는 사상은 찾기 어렵다. 그들의 유일한 키워드는 ‘노무현’뿐이다. 노무현를 중심으로 한 ‘가족 유사성’이 전부인 그들에게 같은 ‘비전’과 ‘기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단순히 MB에 반대할 줄만 안다. 반대는 반대할 대상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MB가 사라진다면 친노는 혼돈에 휩싸일 것이다. 반대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에게는 이 사회를 재편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비전이 없다. 사안이 생기면 그에 입장을 표명하는 수준이다. 핵심 이슈인 FTA, 복지의 방식조차도 그들은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친노’가 다음 시대를 위한 청사진을 구축하지 못하면, 이미지가 전부인 그들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문제는 친노에게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친노에게 다행인 점은 아직 아무도 새로운 설계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노력하거나, 최소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