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층이라는 뜻으로, 열심히 일을 해도 저축을 하기 빠듯할 정도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계층을 우리는 워킹푸어라 말한다. 요즘 경기가 어려운 만큼 세대를 막론하고 워킹푸어가 증가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워킹푸어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중 이른 나이부터 가족부양을 해야 했던 워킹푸어 M(28)을 만나봤다.






Q. 안녕하세요. 요즘은 어떤 일하고 계세요?


A. 요즘은 제가 하고 싶던 공부를 하고 있어요. 철없는 아버지, 어린 동생 키우느라 펼치지 못했던 꿈, 지금이라도 펼치려고요.



Q. 많은 종류의 일을 해보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일을 해보셨어요?


A. 각종 아르바이트, 골프 캐디, 심지어 외국까지 나가서 벌어온 돈, 그 돈만 다 모았어도 전 아마 잘 살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한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Q. 아버지와 동생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어머니는 같이 안 사시는 건가요?


A. , 제가 11살이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이혼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와 떨어져 살았어요.



Q. 그럼 어린 동생도 있는데, 많이 힘들었겠어요.


A. , 많이 힘들었죠.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고 난 후 한참을 방황하셨어요. 맨날 술 먹고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가끔은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죠. 그리고 동생도 엄마가 없으니 항상 집에 혼자 있고,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고 그랬어요.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Q. 경제적으로는 어땠나요?


A. 제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께서 돈을 잘 벌어오셨어요. IMF가 터지기 전이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집이 휘청거렸어요. 그 후로 아버지는 돈을 벌고 오겠다며 다른 곳으로 가셨고, 저와 동생은 아버지 없이 할머니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해갔어요. 하지만 할머니 사정도 넉넉지 못해서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Q. 식당일 쉽지 않았을텐데, 학교 다니면서 많이 힘들었겠어요.


A. 학교 마치자마자 그 식당으로 가서 매일같이 테이블을 닦고 무거운 돌솥들을 옮기고 팔목이 끊어지도록 일했죠. 당시 제가 학생이라 최저임금도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죠. 사장님한테 일 잘한다는 소리 들어서 슬쩍 시급을 올려달라고 말하려고요. 결국에는 최저임금을 맞춰서 받으며 일했던 기억이 있네요.



Q. 학창시절을 힘들게 보내셨는데,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어요?


A. 제 자신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때를 언제다라고 꼽을 수는 없어요. 늘 힘들었으니까요. 대신 저는 동생을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정말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저와 여덜살 차이가 나는데. 당시 9살이었네요.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고, 늘 기죽어 있고.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힘들었죠. 그래도 제일 뿌듯했을 때를 꼽으라면 말할 수 있어요.



Q. 뿌듯했던 적은 언제였나요?


A. 식당 아르바이트를 정말 열심히 하고 월급을 받은 날이었죠. 그날 밤 월급봉투를 들고 정말 너무 기뻐서 골목에서 나 오늘 이만큼 벌었다하면서 소리까지 질렀어요. 이제 이 돈이면 적어도 제 동생한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으니까 기뻤죠. 그 돈으로 동생한테 원피스도 사주고 놀이공원 가서 같이 놀고,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와요.



Q. 인터뷰 내내 동생 얘기가 계속해서 나왔는데, 동생이 커가면서 더욱더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이 됐을 것 같은데, 어땠어요?


A. 동생이 클수록 부담이 많이 된 건 사실이에요. 교복이나 책값이 만만치가 않잖아요. 제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골프 캐디를 했어요. 골프 캐디가 일당으로 받는 데, 정말 시급이 쎄요. 하지만 그만큼 정말 힘들죠. 비가 와도 손님이 필드에 나가고 싶으면 소나기를 맞아가면서 무거운 골프채를 들고다녀야 했죠. 그렇게 골프 캐디를 하면서 동생 뒷바라지를 했어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셨어요.



Q. 어릴 때부터 고생하셔서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A. 제가 요즘 병원을 다니고 있는데요. 그 병원 의사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몸이 엉망진창이라고. 관절이란 관절은 다 상해있고, 몸 균형도 안 맞고, 어떻게 이렇게 지냈냐고요. 정말이지 호주에서는 하혈도 있었어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도 있지만 제가 생각해도 정말 힘들게 일했죠.



Q.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가족을 위해서 말 그대로 벌고 쓰고의 반복이잖아요. 어떻게 견디셨어요?


A. 장녀고 아버지를 부양해야하니까라는 건 거짓말이에요. 사실 전 무능력하고 한번도 부모 노릇 제대로 해주지 못한 아버지를 좋아하진 않아요. 원망하죠. 전 오로지 제 동생 때문이었어요. 제 동생만큼은 저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부유하진 못하더라도 남들처럼 그렇게만 살길 바랐어요. 적어도 지금 내게 처해 있는 이 불행이 내 동생에게 전해지지 않길 바라고, 또 나와 동생 모두가 잘 돼서 그 다음 세대까지도 이런 불행이 전해지지 않기를 하는 마음이었죠. 그래도 동생이 예쁘고 바르게 커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래서 지금은 저도 행복해요. 비록 워킹푸어지만요.(웃음)



Q. 마지막으로 한국의 워킹푸어들에게 전할 말 있으세요?


A.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도 긍정적인 사람이라고는 말 못하겠어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생각해요. 없이 살고 힘들게 살면 기죽기 마련인데, 절대 기죽을 필요 없어요. 굽신 거릴 필요도 없고요. 항상 내 자신의 중심을 지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힘내요!





겉으로 보기에도 그녀는 밝고 당당해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힘든 노동과 스트레스로 앞면 마비, 화병까지 온갖 신경성 질환을 앓았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지만, 그래도 웃음은 잃지 않았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장녀라는 이유로 헌신적으로 살아온 시간들을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비관할 만도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열심히 일을 해도 저축을 하기 빠듯할 정도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계층, 워킹푸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많이 향상됐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하루를 빠듯하게 일해 생계를 유지해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일일이 다 도와줄 순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일궈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더 살날이 많기에 찡그리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처럼 우리 한국의 모든 워킹푸어들도 한국의 미래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