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1일 자정 무렵, 손바닥 반의 반도 안 되는 블랙베리 화면 안의 트위터 타임라인은 그야말로 ‘멘붕’에 ‘멘붕’을 거듭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타임라인’이라고 해야겠다. 분명 이기는 게임이었다. 아니, 이긴 게임이었고, 내 타임라인에서 쟁점이 되던 것은 더 확실히 이기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 뭐 이런 얘기들이었다. 투표율 70% 넘으면 옷을 벗겠다느니 수염을 자르겠다느니 춤을 추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사실상 이미 우리가 이긴 게임을 축하하고 즐기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설마 이렇게 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민심을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다. sns내의 민심은 우리가 이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타임라인과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총선 결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강 정도가 아니라 바다가 있었다. 넷의 바다가.

우리는 sns를 통해, 그러니까 그 넓고 새롭고 또 엄청난 가능성의 넷의 바다를 타고 전혀 모르는 이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 소통수단의 등장은 바로 제한된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엄청난 진보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sns로 접하는 이들이 정말 이 새로운 기술, 엄청난 가능성의 넷의 바다와 같이 낯선 존재들인가? 그렇지 않다. 심지어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들보다도 더욱 단순한 양상을 띠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팔로우하는, 친구를 맺는 그들은 결국 우리가 훑고 골라낸 사람들이다. 편집하는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신경을 긁는 이들을 참아내지 못한다. 시작은 호기심인지 호감인지 알 수 없어도,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이들이다, 혹은 참을 수 있을 정도만 불편하던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낯설지는 않은 당신들을 우리는 골라내었다. 결국 sns를 통해 접하는 세상은 물리적 한계는 뛰어넘었을지 몰라도, 나의 취향, 혹은 나의 상식이라는 틀은 더욱 더 견고해진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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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집된 세상은 현실세계보다 훨씬 상식적이고 편안하며 또 아름답다. 내 주변에는 왜 이런 사람들이 없을까, 하고 뒤늦게 탄식하기도 하며, 트친님들의 힘을 보여주세요, RT해주세요, 라고 외치며 이 ‘새로운 우리’의 힘에 신나하기도 한다. 실제로 sns를 통해 이뤄낸 일들도 많다. 트위터가 있었기에 김진숙 지도위원은 크레인 위에서 끊임없이 여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널리 외칠 수 있었다. 이는 노동자 문제가 노동자에 국한되어 고립되어버리곤 하던 상황을 뛰어넘어 희망버스와 같은 시민들의 광범위한 연대를 이끌어냈고, 한진중공업 노사협상 타결까지의 과정은 sns를 통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례만으로 sns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sns가 세상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어쨌거나 sns는 세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일 뿐이다. 특히나 그 부분이 내가 내 입맛대로 편집한 것일 때, 그 편집한 세상만 보고서 세상을 다 보았노라고 외치는 것은 얼마나 바보같고, 또 위험한 일인가.

현실과 유리된 채 sns에만 몰두하는 것은 결국 안온한 정신적 자위에 불과하다. 이번 총선에서 소위 ‘트위터 민심’이란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지 않았던가. 나는 11일 밤 내 타임라인에서 경악하던 우리들이 어디까지가 ‘우리’였는지, 그리고 각각의 ‘우리’가 편집한 세상이 얼마만한 크기였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닫게 되었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sns를 통해서 더 넓은 세상과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