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한껏 조롱하는 것부터다. 곧 이 연극의 주인공 르네 갈리마드가 될 남자는 먼저 작품 밖의 화자로서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나비부인 이야기의 허울을 벗겨버린다. 미국 해군 장교와 짧은 사랑을 나눈 후 그가 미국에 돌아가 자신을 찾지 않아도 한없이 그리워하다가 이미 결혼을 한 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일편단심을 저버릴 수도 없어서 끝내 생을 끊는 일본 여자. 외형은 너무나 순결하고 눈물 나는 멜로지만, 따지고 보면 고작 서양 건달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버린 어리석은 여자의 이야기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서양 남자가 동양 여자에게 요구하는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핑거톤을 기다리는 나비부인>


목소리를 높여 서양의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을 비꼬던 남자는 어느 새 르네 갈리마드가 되어 있다. 주중 프랑스 영사관의 관료인 르네는 외모도, 능력도 뭐 하나 뛰어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세울 깜냥도 없고 인정받아 본 적도 없는 그는 튀지 않게 사회와 타협하는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다. 내면엔 생활에 대한 권태와 누군가의 우위에 서보고 싶은 욕망이 끓고 있지만. 그러던 차에 송 릴링이라는 중국 여자를 만난다.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주인공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송을 처음 본 순간부터, 르네는 묘한 이끌림을 느낀다. 처음엔 1960년대의 프랑스 남자가 동양인 여자에 갖는 환상과 호감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송을 만나면서 르네는 점점 조신하지만 지혜로우며,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에게 순종하는 여자, 그럼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고 높여주는 동양 여자의 매력에 단단히 빠진다.

송을 조급하게 만들기 위해 두 달간 일부러 찾지 않은 후, 진급했다는 기쁨으로 흥분해서 송을 찾아간 르네가 말한다. “당신은 나의 버터플라이입니까?” “이미 당신에게 나의 수치심을 드렸다.”는 송의 말을 르네는 자신만의 나비가 되어달라는 것으로 재확인 하려 한다. 송이 긍정의 답을 하는 순간, 르네는 드디어 자기가 만든 환상에 돌이킬 수 없이 갇힌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지배당하길 원한다는 사실은 그를 들뜨게 하는 것이었다. 관계를 해도 절대로 벗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송을 르네는 그저 동양여자의 수줍음 정도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수줍음과 보수적인 면모는 일차적으로는 당황스러운 것이었으나 곧 르네의 성적, 사회적 우월감을 오히려 만족시켜 준다.

 


르네의 환상이 정점을 찍는 동안
, 관객의 긴장 역시 최대치로 향한다. 관객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송은 여자가 아닌 남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공산당 아래서 지령을 받고 스파이 활동을 하는. 한 마디로 송의 접근은 계획이었다. 한편,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신경전이 중국 사회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르네는 자신이 건의했던 외교 정책의 실패를 떠안아 프랑스로 귀환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아이까지 나았다는 송에게 한 청혼은 거절당해 결국 르네 혼자 프랑스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송을 잊지 못하여 중국에서의 나날들을 추억하는 것으로 환상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송이 프랑스에 그를 찾아온다. 환상을 환상이 아닌 현실로 다시 마주하게 된 르네는 이후 20년간 송과 함께 한다. 하지만 송은 결코 르네에 대한 순결로 프랑스에 온 게 아니었다. 공산당의 불순분자 정리가 한창인 때, 호의호식했던 예술가인 송은 프랑스 외교관 르네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걸로 처단을 피해야 했던 것이다. 20년 후, 법정에서 기밀 누설로 법정에 선 그는 그제야 남자의 모습으로 말끔히 차려입은 송을 본다. 송은 자신의 본모습과 그 동안 르네를 속이며 했던 첩보활동을 증언하지만 르네는 믿을 수가 없다. 법정에 선 송은 절대로 그의 나비가 아니니까.

송이 말했었다. 왜 중국 오페라에서 남자가 여자 역을 맡는지 아느냐고. 그것은 남자만이 남자가 원하는 여자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송은 또 법정에서 말했다. 자신은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벽히 남자일 수 없었다고. 남자이면서도 완벽하게 남자일 수 없던 송은 그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한편으론 이용해서 르네의 나비가 되었다. 남녀 간의 위계질서에서 스스로가 먼저 기꺼이 몸을 낮추는 여자라면 남자는 언제나 관대해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자신 역시 남자이기에 잘 아는 내밀한 본성을 동양여자의 미덕으로 포장해서. 하지만 송 역시 스파이 활동이라는 목적 외에도 르네가 그러했듯 이국에서 온 낯선 사람에게 이끌렸다. 서양 남자가 동양 여자에게 품은 환상은 왜곡된 모습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미 패권을 빼앗겨 오래됨만 남은 아시아 사람이었던 송은 마치 약자가 강자를 동경하듯 필연적으로 세상을 이끌어가는 서양 세계의 일원에게 어떤 경외감과 호기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넋을 놓은 르네에게 송은 마침내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드러낸다. 르네는 결사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지만 환상은 결국 깨지는 법. 수십 년간의 삶이 망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르네는 감옥에서 자신의 사연을 한탄하듯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푸치니의 나비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여자의 새하얀 분칠을 한 후 자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m 버터플라이>는 하나의 막과 장으로만 진행된다. 따라서 무대세트가 변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송과 르네가 처음 오페라 나비 부인을 통해 만나고, 사랑을 하고 환상을 깨어 진실이 드러나는 그 모든 순간들은 거대한 새장으로 형상화된 무대 세트 안에서 벌어진다. 새장은 결국 새장일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외관만은 아름답다. 르네 환상 속의 송은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운 나의 나비!’였으므로.

  

연극 <m 버터플라이>를 흥미롭게 관람한 사람이라면 동명의 영화 ‘<m 버터플라이>’와 비교해 보는 것도 즐거운 리뷰 방법이다. 영화의 르네 갈리마드는 영국의 대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았는데, 관객들은 배우 한 명으로 인해 영화의 품격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이보다 더 제대로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군살이라곤 없는 외모에, 애수 어린 눈빛을 소유한 제레미 아이언스는 틀림없는 유약한 지식인이다. 만약 불순한 누군가가 제대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그는 마수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가 맡은 캐릭터 역시 뒤틀린 내면을 가지고 있다 해도 관객은 제레미 아이언스이기 때문에, 용납한다. 이 점은 로리타, 데미지 등 그의 다른 영화에서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는 퇴폐적인 사랑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리고 덕분에 영화 <m 버터플라이>는 연극 <m 버터플라이>와 르네의 모습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다른 방향을 걸을 수 있었다. 영화의 르네는 그저 성실하게 가정 내외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또 제레미 아이언스의 탈을 쓴 르네는 당연히 찌질하지도 못나지도 않다. 굳이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명예와 지위는 획득한, 엘리트처럼 보인다. 르네가 송에게 매료된 이유도, 자기 안에 숨겨진 정복욕 때문이라는 건 파악하기 힘들다.

비록 이 연극의 백미인 서양과 동양,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기찬 논리는 말로써 일일이 담지 못했지만 영화가 연극과 또 다른 매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오히려 현명하고 색다른 선택이었다. 연극은 오로지 대사로 극을 풀어내는 데 비해, 영화는 장면과 장면의 조합이다. 분명 <m 버터플라이>가 말하고자 하는, 르네가 가진 환상의 뿌리, ‘환상이라는 말로 덧칠했으나 지극히 제국주의적 사관으로 동양을 대했던 서양인,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를 주도한다는 남자에 대한 해석은 바래졌다. 반면, 이 기묘하고 비정상적인 사랑에 대한 몽환적 분위기는 제레미 아이언스라는 배우의 기용으로 더욱 극대화되었으니 이미지와 아우라의 매체인 영화로서 <m 버터플라이>는 또 다른 빛을 낸다. 말하자면 연극은 연극답고 영화는 영화답다.

무엇으로 <m 버터플라이>를 접하건, 본 내용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르네와 송의 이야기가 실화라는 것. 이 점을 알고 본다면 스스로가 놓은 덫에 빠진 르네를 더욱 가엽게 여길 수 있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