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팀 롯데 자이언츠는 열광적인 팬들과 독특한 응원문화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로이스터 감독 시절 뉴욕타임스가 롯데의 열렬한 응원에 대한 소개 기사를 썼을 정도였다. 주황색 비닐봉지와 신문지를 이용한 색다른 응원도구를 들고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는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늘 팀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자랑한다. 한때 ‘8888577’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몇 년 전만 해도 팀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팬들은 계속해서 사직구장을 찾았다. 강팀 반열에 올라선 요즘 들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롯데 팬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이번 유로 2012에서의 아일랜드 팬들이었다.






아일랜드의 골키퍼 셰이 기븐. 팀은 부진했지만 기븐은 홀로 분전했다. 출처: 연합뉴스







이번 유로에서 아일랜드 대표팀의 성적은 참담하다. 조별예선 3전 전패다. 득점은 한 골에 불과하고, 실점은 무려 9골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등 강팀들과 한 조에 속했기 때문에 예상된 결과일수도 있지만, 객관적인 지표를 떠나서 경기 내용이 너무 무기력했다. 수비는 상대의 패스 한 번에 무너졌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골키퍼 셰이 기븐(아스톤 빌라)의 신들린 선방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골을 내 줄 수도 있었다. 공격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기대를 모았던 아이덴 맥기디(로코모티브 모스크바)와 로비 킨(LA갤럭시), 두 공격 에이스는 침묵했다. 오죽하면 주장인 로비 킨이 대회가 끝나고 “창피하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라는 자조적인 발언을 했을 정도다. 성적으로 보나, 주목도로 보나 이번 유로에서 아일랜드는 철저히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며 선수들을 응원하던 아일랜드 응원단의 모습마저 주변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6월 15일(한국시각) 스페인전, 세스크 파브레가스(바르셀로나)에게 네 번째 골을 내 주며 사실상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아일랜드 팬들은 더욱 힘을 냈다. 후반 38분부터였다. 관중석 곳곳에서 응원가가 흘러나왔다. 이미 승부가 결정된 뒤였지만 경기장에는 초록 물결이 끊임없이 흘렀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도 초록 물결은 멈출 줄 몰랐다. 그곳에서는 <Fields of Athenry>(아덴라이의 평원)라는 아일랜드의 민중가요가 흘러나왔다. 1840년대 의 아일랜드 대기근을 소재로 한 이 노래는 아일랜드 대표팀이 경기에 지고 있을 때 팬들이 선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다. 1970년대에 아일랜드 작곡가 피터 세인트 존이 작곡했고, 지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때부터 아일랜드 팬들이 선수들에게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대기근 당시 잉글랜드에게 지배받고 있었던 아일랜드 민족의 설움과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정신, 그리고 기근에 시달렸던 아일랜드 국민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다. 한국의 ‘아리랑’과 비교할 수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전에서 포즈난 응원(경기장을 등지고 어깨동무를 한 채 펄쩍펄쩍 뛰는 응원)을 펼치는 아일랜드 팬들







Low lie the field of Athenry(아덴라이 평원 위에 누워)

Where once we watched the small free birds fly(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을 봤지)

Our love was on the wing, we had dreams and songs to sing(우리의 사랑은 날개를 달았고 꿈을 꾸고 노래를 불렀지)

It’s so lonely round the fields of Athenry(이제는 너무나 외로워진 아덴라이 평원에서)


                <Fields of Athenry> 중




노래를 들은 선수들은 힘을 냈다. 크게 뒤지고 있었고 사실상 탈락이 확정되었지만, 더 이상 골을 내 주지 않기 위해, 한 골이라도 넣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경기는 그대로 4-0으로 끝났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팬들의 응원마저 헛된 것은 아니었다. 아일랜드에서 2000km도 넘게 떨어진 폴란드 그단스크 시의 아레나 그단스크는 어느새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마치 승리한 것처럼 손뼉을 쳤고, 함성을 질렀다. 탈락이 확정된 뒤 치러진 이탈리아 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껏 웃음을 띤 얼굴로 같은 줄의 관중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방방 뛰었다. 아일랜드는 이날도 2-0으로 패했다. 스페인전보다는 경기력이 나아졌지만 객관적인 전력 차를 극복하기엔 많이 부족한 경기력이었다. 그럼에도 아일랜드 팬들의 응원 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팬들은 예선전을 마친 선수들에게 수고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들의 응원은 결코 승자인 스페인, 이탈리아의 응원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제 3자에게도 감동을 준 그들의 응원이 어떤 면에서는 더 멋있었다. 




유로2012 우승을 차지한 스페인 선수들이 우승 트로피인 '앙리 들로네'를 번쩍 들고 환호하고 있다.









한 달여 동안 이어진 유로 2012는 7월 2일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결승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름만 들어도 팬들을 설레게 하는 선수들이 경기장을 뛰어다녔고, 멋있는 골과 환상적인 선방이 팬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세계 각국의 미녀들이 총출동하여 세계 언론에 널리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이 모두를 빛나게 한 것은 팬들의 힘이었다. 당초 폴란드-우크라이나 지역의 고질적인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증 때문에 관중 유치 걱정을 많이 했지만, 대회 기간 내내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결국 그곳도 스포츠 경기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관중들이 선수들에게 우레와 같은 응원을 보내면, 선수들은 보다 열심히 경기에 임했다. 물론 어디를 응원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는 우승팀 스페인을 응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준우승팀 이탈리아를 응원하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아일랜드, 스웨덴 등 조기 탈락한 다른 나라를 응원하기도 한다. 서로 응원하는 국가는 다르지만, 이들 자체가 각각 다른 건 아니다. 경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팀을 성원하는, 똑같은 팬들이다. 



간혹 어떤 팀을 응원하느냐에 따라 팬의 위아래를 나누려고 하거나, 상대팀 팬을 크게 의식하는 경우가 있다. 우승팀을 응원하면 괜히 우쭐해지지만, 꼴찌 팀을 응원하다 보면 괜히 창피해지고 주위의 시선을 살피게 된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에서, 꼴찌팀 삼미를 응원하던 ‘나’와 조성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잔뜩 몰려 있던 OB베어스 어린이 팬들을 보면서 수치심을 느낀다(삼미는 1982시즌, OB에게 단 1승도 거두지 못할 만큼 OB만 만나면 쩔쩔맸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을까? 스페인의 팬과 아일랜드의 팬이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OB베어스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도 같다. 왜 굳이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냐를 나눠야 할까. 왜 누군가를 홍어라 불러야 하고, 누군가를 고담이라 불러야 할까. 왜 그렇게 서로를 낙인찍어야 할까. 다들 똑같은 팬인데 말이다.



한국의 스포츠 댓글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댓글 양상 중 하나가 각 팀의 팬들(혹은 팬을 사칭하는 안티나 어그로 종자들)이 상대팀 혹은 상대팀 팬들을 무조건적으로 깎아내리는 내용이다. 오늘 그 팀이 패하기라도 하면 타 팀 팬들의 집중 공략 대상이 된다. 그러다가 만일 오늘 졌던 팀이 내일 이기면 이번에는 반대로 그날 이긴 팀의 팬들이 기세등등하여 상대팀 팬을 공격한다.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다. 성적이 안 좋은 팀의 팬은 때로 자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행위들은 무의미하다. 팬이라면 그저 응원이나 격려, 혹은 자기 팀에 대한 뼈 있는 비판과 걱정을 통해 응원하는 팀을 성원하면 된다. 다른 팀을 비하하고, 자기 팀을 비하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일시적인 욕구 불만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까는 행위’를 통해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통해 말이다. 상대팀 팬이 자신의 댓글로 인해 열폭(열등감 폭발)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런데 그런 만족감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결국 다시 결여된 상태로 돌아오곤 한다. 그리고 그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깔보고 낮추는 정도는 점점 심해진다. 그렇게 악순환에 빠진다.


아일랜드 팬들은 떳떳했다. 3전 전패, 무력감에 빠질 만한, 아무리 팬이라도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성적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고, 또한 박수를 보내 주었다. 응원하는 팀이 3전 전패를 했다고 해서 누구도 그런 아일랜드 팬들을 조롱할 자격은 없다. 오히려 나는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팬이라고 생각한다. 성원하는 팀이 어려움에 처해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지지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팬이다. 진정한 팬이라면 성적에 의해 팀에 대한 애정이 좌우될 수 없고, 좌우되어서도 안 된다. 단순히 팀의 성적으로 인해 그 팀에 대한 팬심이 흔들리는 이들에게, 과연 팬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아일랜드 팬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