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독립기념일!

성인이 된 20대가 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독립기념일’은 가상의 화자 ‘나’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연재 소설입니다. ‘나’의 독립 스토리를 통해 20대의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20대의 독립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8화

화요일이다. 채영이와 밥을 먹기로 한 화요일이다. 원래 화요일은 오후 6시부터 피자가게로 알바를 하러 가야하지만, 저번에 정우 형이 급한 일이 생겼다며 부탁을 해오는 바람에 대타를 뛰어준 적이 있어서 이번 주 화요일 저녁만 특별히 쉴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일을 바꿔달라 했을 때는 좀 짜증났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오늘은 알바에서 해방되니 참 좋다. 일어나 이를 닦으며 채영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채영아, 오늘 몇시에 볼까?^^’


‘음…… 공강 시간 언제세요?’


‘아, 공강? 음… 저녁에는 시간 안되니?;;’


‘아… 제가 저녁에는 일이 좀 있어서… 좀 그런가요?’


‘아니야! 난 12시부터 2시까지 공강이야~ 너는?’


‘전 1시부터 2시까지요. 1시에 봐요 오빠’


‘그래, 그렇게 하자. 수업 끝나고 연락해~^^’



당연히 저녁식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심에, 그것도 학교 안에서 보게 되어버리니 뭔가 맥이 빠진다. 카톡을 하느라 입에 그냥 물고 있던 칫솔을 타고 치약거품이 질질 흐른다. 황급히 핸드폰을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입을 헹구어 낸다.



‘그래, 어차피 돈도 얼마 없었는데, 학교 밖에서 그것도 저녁 식사였으면 답이 안 나온다. 채영이 공강 시간도 한 시간밖에 안되니 학교 밖으로도 못 나갈 것 같고, 교내식당에서 학식이나 먹어야겠는데…… 으휴, 그래! 돈도 없었는데 잘됐어, 잘됐어!’



나갈 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끝냈다. 자꾸 잘됐다는 말을 되뇌다 보니 정말 다행스럽기가 그지없게 느껴졌다. 난 지갑 안에 만원만 남겨두고 체크카드며 잔돈을 다 책상서랍에 넣어놨다. 요즘 생긴 습관이다. 이렇게 하면 어쩔 수 없이 집에 올 때까지는 만 원 이상은 못 쓰는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내 쪽에서 밥 산다는 말을 먼저 꺼내놓고는, 여자애한테 학식밖에 못 사주는, 그리고 학식밖에 못 사주게 되어버린 상황에 오히려 안도하는, 그래서 만 원 한 장 달랑 들고 나가는 내 자신이 궁상스럽고 초라하고 또 짜증이 났다.



‘이승원, 이게 네가 원했던 독립인의 모습이냐?’


‘여자친구도 아니고 그냥 아는 여자애 밥 한번 사는 거야. 너무 오바해서 의미부여할 필요 없다고.’
 



오전 수업이 끝나고, 채영이를 만나기로 한 1시까지 뭘 할까 생각했다. 과방에 가 있을까? 아니다, 지금 가면 딱 점심시간 한가운데라서 후배들 눈치가 보일 것 같았다. 내가 신입생일 때도 으레 선배들이란 밥 사주는 사람으로 알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처럼 ‘밥 사주세여’ 했지만은, 지금 신입생들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 때 거기다 대고 ‘돈 없어서 안돼’ 라고는 정말 말하기가 싫었다. 돈 없다는 게 핑계가 아니니까. 과방 가 본지가 오래인 것 같았다. 독립한다고 선언까지 하고 나왔는데 당연히 내 손으로 돈 버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작한 알바는, 처음에는 얼마 안되는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학교 수업 이외 생활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알바가 끝나고 나면 피곤함에 씻기도 전에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은 때도 많았지만, 과제며 조별모임이며 쪽지시험대비며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또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일요일에 하루 종일 근무를 하고 난 다음날 월요일은 하필이면 9시부터 수업이 있어 헐레벌떡 모자만 눌러쓰고 뛰어가야 간신히 지각을 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렇게 학업과 알바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번 돈은 60만원 남짓, 고시원비를 내고 생활비, 통신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용돈 받던 시절에도 돈은 항상 부족했지만, 내가 번 돈으로 내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지금과 그 때의 위기감은 사뭇 달랐다. 과방에서 같이 놀던 동기들이며 선후배들이 간간히 같이 놀자고, 요즘 왜 과방에 안 오냐며 묻기는 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점점 연락이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인다. 좀 서운하기도 했지만, 아마 걔네들은 내게 서운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돈이 없으면 어울릴 수 없는 사이란 건 얼마나 얄팍하고 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 지갑 속에 달랑 한 장 들어있는 만원을 다시 한 번 꺼내들고는 지갑을 다시 뒤져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를 만나는데 만원은 심했나? 지갑 구석에 그래도 쓰다 남은 단 5천원이라도 있지 않을까 부질없는 희망을 갖고. 그렇지만, 뭐, 내가 알고 있던 그대로 내 지갑에는 달랑 만 원 한 장이 전부였다.



“오빠”


“흐억”
 



이런 저런 생각들도 다 흘러가고 이제는 아무 생각도 안 드는 상태로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데, 채영이가 바로 뒤에서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 45분이었다. 내가 어딨는 줄 알고 연락도 안하고 그냥 왔지?



“저 바로 여기서 수업들어요. 수업 끝나고 나오는데 바로 그냥 보이길래……”



아, 그렇구나. 채영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물을 보면서 나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아, 생각보다 민망하다. 처음 만나는 건 아니지만 일터가 아닌 학교에서 이렇게 단 둘이 만나니 어색했다. 아, 내가 그래도 남잔데, 게다가 먼저 만나자고 했는데, 하, 이걸 어쩌지?



“아, 오빠, 저 학생식당에서 세척알바해서 그냥 가서 밥 먹으면 되거든요….. 식권은 오빠 것만 사면 될 것 같은데……”


채영이는 학교 밖에서만 알바를 하는 게 아니고 교내에서도 알바를 하고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식기세척 알바를 하면 식당 밥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얼떨결에 내 식권만 한 장 달랑 사서 채영이와 나란히 줄을 섰다. 밥을 먹는 동안도 채영이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물어보면 밥을 씹던 입을 가리고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고 작게 웃었다.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밥 사준다고 불러놓고 밥은 지것만 사서 먹고 있고! 이게 아닌데!




“채영아, 커피라도 마실래? 내가 밥 사준다고 불렀는데……”
 



학교 안에도 카페가 있지만, 모처럼이니 그럴듯한 카페에 가서 그럴듯한 커피를 사주고 싶었다. 학교 앞 별다방으로 채영이를 거의 떠밀다시피 해서 데리고 갔다. 메뉴판 앞에 서서 커피 가격을 쭉 보았다. 이런 데 와서 커피 마실 일이 없으니 가격도 잘 몰랐다.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다. 어쩌지? 아까 산 식권 값 3000원을 빼면 지금 쓸 수 있는 돈은 지갑 안에 7천원 뿐인데, 어쩌지? 식은땀이 흐른다.


Ⓒ 본 이야기와 사진은, 스타벅스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채영아, 너 뭐 마실거야?”


“음…… 전 아이스아메리카노요.”




다행이다, 채영이가 개중 싼 걸 골랐다. 그래도 여전히 내 것 까지 두 잔을 사기에는 돈이 모자랐지만. 그 때 갑자기 지갑 속에 몇 달 전에 친구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둘이서 자주 갔던 별다방에는 다시는 안 갈거라며, 너희나 나눠 쓰라고 애들한테 한 장씩 뜯어줬던 할인권이 생각났다. 이거면 둘이서 한 잔씩 딱 살 수 있다! 채영아, 너는 내가 머뭇거린 3초의 이유를 영원히 모를거야, 하하.



“손님, 정말 죄송하지만 유효기간이 지난 할인권이세요.”“네?”



아, 정말 창피했다. 채영이는 고맙게도 재빠르게, 그렇지만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오빠, 저 커피 안 마셔도 괜찮아요’라고 말했지만, 내 표정은 빠르게 굳고 있었다. 아, 난 멍청하게 왜 할인권 유효기간도 확인을 안했을까? 왜 미리 난 커피 안 마신다고 실드 쳐두지를 않았을까? 왜 더 싼 교내 카페를 마다하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 커피를 마시자 했을까? 왜 난 돈을 만 원만 들고 나왔을까? 왜 난 그 때 받은 월급 아낄 줄을 모르고 치킨이랑 맥주를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아, 아, 난 왜, 독립을 한다고 했을까?



“오빠, 괜찮아요?“



카페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괜찮다는, 급기야 ‘안 마실래요’ 라고 말하는 채영이 손에 나는 굳이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들려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앞으로 알바 가서 채영이 볼 낯이 없을 것 같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카페에서 나온 후로 연신 내 눈치를 살피던 채영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빠, 저…… 다음 수업에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먼저 가볼게요.”


“어..어… 어? 그래, 잘 가. 벌써 2시네, 미안해……“



늦게까지 잡고 있어서 미안한건지, 밥 사준다고 불러놓고는 변변찮은 대접이라고는 하지도 못해서 미안한건지, 나도 모를 미안하다는 말을 웅얼거렸다. 채영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탁탁탁 긴 머리가 등에 흔들리도록 뛰어갔다. 수업 듣는 건물까지 또 가려면 멀 텐데, 여기까지 굳이 끌고 나온 게 또 너무 미안했다.



“오빠, 고마워요, 커피 잘 마실게요!”



오늘 처음으로 듣는 채영이의 큰 목소리였다. 뒤돌아서서 손을 흔드는 채영이가 순간, 진짜로 무지하게 이뻐보였다. 창피함과 미안함으로 옥죄이던 가슴이, 내일이면 또 알바가서 채영이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활짝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