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낸 하승우는 정치학으로 오래 공부했으나 결국 자기 길을 학교 안이 아닌 길 위의 풀뿌리 운동에서 찾았다. 현재 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에 몸담고 있으나 현장에서는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http://grasslog.net/home)운영위원으로 더 유명하며, 녹색당원이다. 그는 총 아홉권의 책을 냈으며 이 책 《민주주의에 反하다/낮은산》은 가장 최신의 작업이다. 지난 저서 목록을 살펴보면 그의 지적 지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약간은 짐작할 수 있다.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 《아나키즘/책세상》,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뜨인돌 출판사》 하승우는 국가가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일 수 있다는 가정에 의문을 품는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양 진영의 예비 대권주자들의 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현재와 미래의 복락과 우리 삶의 존엄까지도 약속하는 예비 국가권력의 달콤한 약속이 한참 우리 귀에 맴돌 것이다. 하지만 하승우의 책을 보고 나의 의문은 깊어졌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 진짜 민주주의 안에 국가권력의 자리는 있을까, 없을까. 민주주의를 꿈꾸는 모든 바람은 결국 국가권력의 쟁취로 귀결되는가.

 


민주화 운동을 실제 했던 세대들은 제도적, 절차적인 측면에서 거둔 현재의 성과에 자족할 권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60대 이상이 전쟁의 폐허에서 일궈낸 한강의 기적을 마음껏 자랑스러워할 권리를 가지는 것과 같다고 본다. 나는 80년대에 태어났으니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덕분에 우리 또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전 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리버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비교 대상인, 훨씬 가난했거나 야만스러웠던 과거가 없다. 그래선지 몰라도 “보릿고개 겪다가 이만큼 먹고 사는게 누구 덕인데” 라는 식의 자족과, “정치적 민주화는 달성했고, 경제적 민주화가 문제”라는 식의 자족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서로 간에 큰 차이 없는 꼰대다. 오늘날 망월동 묘지 참배 행사는 여러모로 현충일 국립묘지 참배 행사와 동격에 올라섰다. 걸맞은 역사적 평가를 받고 마땅한 지위를 획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알맹이와 맥락이 모두 제거된 또 하나의 “국민의례”로 박제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선거철엔 고작해야 야당 표밭으로나 동원되라는 다그침을 당하고 일상에서는 실업의 고통 속에, 혹은 입시의 고통 속에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생으로 착취 당하는 청년에게 매년 5월 광주란, 망월동이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386세대가 (노무현 집권기를 정점으로)”달성했다” “완성했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정치적 민주화의 허상을 고발하는 책의 1부는 일부 보상받은 386들이 제멋대로 닫아버린 망월동을 거부한다. 그들의 공식적 입장과는 달리 민주화는 완결되거나 올바르게 닫힌 적이 없다. 나꼼수가 힘차게 일으킨 반MB담론(뒤집어 말하면 노무현으로 돌아가자 담론)은 다 닫은 역사의 문에 조그만 생쥐가 쥐구멍을 쏠았으니 그 쥐구멍만 땜빵하면 된다는 식의 논리로, 상당한 간편성과 수월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덕분에 뭇 사람의 마음을 끌었지만 어디까지나 현실과 괴리된 동화였고 그렇게 끈 인기가 오래 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비키니 파문이 없었어도 나꼼수 열풍은 적절하게 사그러들었을 것이다.

강정마을. 사진은 Matthew Hoey작.

책의 2부는 각각 소유, 노동, 교육, 탈핵, 평화 등 각각 너끈히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나올 만한 굵직한 주제를 챕터별로 담았다. 분과적 시선에서 보면 각기 동떨어진 주제일지 몰라도 사실은 다 한데 엮어 돌아가는 이야기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구럼비 바위를 깨뜨려야 한다고 강변하는 강정마을 문제가 그렇다. 낙후 지역에 건설한 핵발전소의 에너지를 서울로 올려 보내기 위해 설치한 밀양 송전탑은 지역 원주민의 일상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다. 두 사건에서 모두, 실제 이해당사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절차는 실종되고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 주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 따로 건져내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게 진보적 감수성의 척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는 립시Lipsey의 차선이론과도 비슷하다. 완전경쟁시장의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 못하면 한개 더 만족하거나 한개 덜 만족하거나 전자가 효율성에서 결코 낫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라는 분류는 ‘보상받은 386’들이 전자에서 거둔 성과를 부각하기 위한 분류일뿐, 적절한 구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20세기의 성공한 민주주의자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인도의 국부(國父) 네루는 간디의 제자였다. 그러나 간디가 영국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물레를 돌리는 지점에서 네루는 스승과 결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루의 해결책은 의회 민주주의와 상비군을 갖춘, 산업 국가였다. 인도 민중을 온갖 유무형의 폭력으로 억압하는 영국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소금을 만드는 간디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둘 사이에 오간 서간을 보면 네루는 어쨌든 스승을 끝까지 존경했던 것 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끝내는 간디가 옳았다고 믿는 편이지만 1940년대의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네루가 그렸던 국가, 네루의 신념을 또 너무나 이해하지 않을 수 없어 서간을 보며 마음이 먹먹했다. 인도가 핵무장 클럽에 든 지금 그 신념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지, 후대에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예상할 수 있기에. 한때 의로웠으나 괴물이 된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슬프다. 
 

책을 읽는 내내 한국의 민주화 투사들을 다시 생각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그들이 박제된 망월동을 기리는 한, 성장과 분배 중 무엇을 앞세우든 간에 그 프레임에 갇혀있는 한 장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그 무엇을 대표할 순 없을 것이다. 평화를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하고 아무리 좌파라도 군대의 정당성은 의심할 수 없으며, 투명하고 철저하게 관리하는 한 핵발전은 안전하다고 믿는 한, 과거의 어떤 의인도 오늘날의 괴물을 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