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독립기념일!

성인이 된 20대가 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독립기념일’은 가상의 화자 ‘나’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연재 소설입니다. ‘나’의 독립 스토리를 통해 20대의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20대의 독립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12화

아침 햇살이 힘없이 노트 위에 내려앉았다. 내 눈꺼풀도 힘없이 내려앉았다. 계절학기라 절반쯤 찬 강의실에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무난하다는 평을 듣는 강의였다. 조모임 없음, 과제 많지 않음, 출석과 과제, 시험으로 성적 결정. 교수의 줄줄이 읽어나가기만 하는 지루한 강의는 학점세탁이 절실한 학생들에게는 꽤 잘 먹히는 듯 했다. 절실하기는 나도 매한가진데 좀처럼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잠깐 한줄 필기를 한 후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학점세탁에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실은 억울했다. 수업을 그렇게 열심히 듣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재수강을 해야 될 정도로 불성실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가하면 매일 알바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치고는 나름 열심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별로 빠진 적도 없고 가끔 알바 때문에 조모임을 못하거나 과제를 빠트리긴 했지만 시험공부만은 정말 열심히 했다. 나름 열심히 학교생활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쓰디쓴 착각의 대가는 즐거운 모닝 계절학기다.

“생각해보니까 술 정말 오랜만에 먹네요.“
주거니 받거니 쓰디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게. 으~ 달다 달아.”
결국 수업을 마치고 한 잔하자던 정우 형을 만나 초저녁부터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첫 손님인지 에어컨은 그제야 굉음을 내며 돌기 시작했고 고기 집은 후끈후끈했다.
“어우, 고기 집이 찜통이네. 육수가 줄줄 나오네.“
고기를 구우면서도 정우 형은 연신 부채질을 했다. 나도 열기를 쬐고 있으니 땀이 뚝뚝 떨어졌다.
“형, 날도 더운데 제가 무서운 얘기 해드릴까요?”
“무슨 무서운 얘기야 이 나이에. 내가 무서운 얘기를 한 두번 들어본 줄 알어?”
정우 형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귀 기울이는 폼이 궁금하긴 한가보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전에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강의실 복도는 평소와 다르게 한산했다. 아니,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텅 비었다. 내 발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여느 때면 따가운 눈총을 받았거나 오가는 사람들에 치일 테지만 강의실 복도를 달리는 내 앞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더 불안했다. 왜 아무도 없는 거야. 하다못해 눈꼴시린 커플이라고 복도에 있길 바랐다.
 
엘리베이터를 그대로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헉헉대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 마침내 문 앞에 섰다. 짧게 심호흡하며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 문이 덜컥하고 열렸다. 나오던 사람은 당황해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문에 찧은 손을 멍하니 잡고 있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비켜서자 그 사람은 나를 지나쳐갔고 나는 그 뒤편을 볼 수 있었다. 조교로 보이는 사람 앞에는 학생 두 명이 무언가 열중해서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힐긋 보더니 다시 쟤 일에 열중했다. 내 기대가 져버린 셈이다. 나는 백 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저 자신도 알 수 없는 용어를 써가며 종이의 여백을 채우고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불청객인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봤어야 했다. 
당혹스럽게도 나를 반겨주는 것도 한 무더기의 시험지를 정리하는 조교와 마지막까지 답안을 채우는 독종 둘이었다. 그 순간 나는 ‘늦잠을 자 기말시험을 놓친 바보1’이 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시험에 늦은 건가. 혹시 지금 말하면 잠깐이라도 답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조교의 냉담한 눈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펜 한번 놀리지 않고 너무도 쉽게 F를 받아낸 셈이다. 만사가 귀찮아 졌다. 그저 쉬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대로 잠이 부족한 내 머리는 그냥 비어버렸다. 그 날 오후에 있던 시험을 어떻게 쳤는지 모르겠고 채영이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잠깐 스쳐지나간 것 같다, 그냥 고시원에 돌아갔다. 어제, 아니 오늘 시험공부의 잔해가 책상 위를 더럽히고 있었다.

 
 

알바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고시원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열심히 살겠다고, 보란 듯이 독립하겠다는 나는 늦잠을 자서 기말시험을 날려버리며 이번 학기를 마무리했다. 알바가 끝나면 항상 열시가 넘고 지쳐서 쓰러지는 게 일상이었다. 과제도 밀리기 일쑤인데 공부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결국 시험 전 주부터 밤새 공부해야했다. 알바는 시험기간에도 알바생이었다, 학생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나머지 나를 완전히 배재해야 했다. 시험 당일 나는 이불을 박차고 나오면서도 사실은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 달에 받아본 성적표에는 F가 찍혀있었다. 교수는 평소에도 불성실한 주제에 기말고사도 안친 내가 어지간히 괘씸했나보다. 어쩐지 꼬장꼬장하더라니.  성적이 곤두박질 쳤으니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학점을 인질로 한 몸값을 지불하고 계절학기라는 타협에 응했다.
 
 
“…….그랬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에요.“
“꿈에 나올까 무섭네.”
 
정우 형은 씁쓸한 소주를 다시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