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낙이 온다. 우리 옛 선인들께서 하신 말씀이다. 현재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이 말은 곧 한국 사회라는 지리멸렬한 고통 속에서 언제 가는 끝을 볼 날이 있을 거 라는 위안 섞인 말이다. 대학의 학벌이라는 지위를 점하기 위해 고등학교부터 경쟁을 해온 우리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학가면 모든 것이 끝이다’ 라며 달콤한 말로 우리를 통제하시던 선생님들의 말은 다시 취업하면 너의 앞날이 보장될 것이다 라면서 변한다. 고통을 감내하라는 지상최대의 명령은 스펙을 위해 밤낮없이 내 자신의 열정을 바쳐 무엇이든 해내야한다.

보통 선인들의 격언은 자신이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이미 경험한 자들의 일들을 참고해 더 나은 결정을 하는데 있어 준거점이 된다. 앞서 말한 속담도 마찬가지이다. 경험이 없는 청춘들에게 ‘현재를 희생한 고생’이라는 노동이 결국 어떤 보상이 될 것이라는 말은 일천한 경험 속 에서 어느 정도 겪어본바가 있기에 대다수의 청춘들에게 이 말을 희망으로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현재의 상황 속 청춘들의 미래는 격언처럼 찬란히 빛날까?

소설 ‘메타볼라’는 이런 환상을 갖고 있는 대다수 청춘들에게 당신이 믿고 있는 잘될 거라는 미래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악순환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이 기다릴 뿐이라고 청춘의 찬란한 미래를 음울하게 그려낸다. ‘88만원세대’에서 박권일 씨가 써놓은 개미지옥 묘사부분을 보면 다른 개미 친구들과 손잡고 개미지옥에서 빠져나갈 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개미지옥에서 몸부림치며 나 혼자만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서로 살아남으려 하다 결국 모두 다 죽게 되는 내용이 나온다. 


메타볼라의 절망은 바로 개미지옥을 닮은 사회 구조 속에서 몸부림치는 개미들의 이야기다. 제목의 ‘메타볼라’는 건축용어 ‘메타볼리즘(Metabolism, 도시 사회를 생명체로 바라보는 건축학적 관점을 뜻한다)’에서 착안해 작가가 만든 조어로, 작품 내적으로 청년층을 잡아먹고 자라는 현대 사회를 상징한다. 청춘들의 열정이든 무엇이든 기성세대는 자신의 기득권유지를 위해 자신이 결정해놓은 사회구조를 통해 청년층을 착취해 가며 이런 구조는 자신의 생명력을 더욱 확장시키며 무서운 구조를 만들어낸다. 거대한 생명체는 앞서 말한 개미지옥을 만들어내고  환상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청년들에 의해 더 이상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수없는 불멸의 생명력을 얻게 한다.  

개미지옥 사회 속에서 결국  구조 속에서 희생 당하는 존재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가정이 붕괴돼 더 이상 어떤 특별한 지원이 없거나 아무리 좋은 부모를 만나더라도 인정받지 못한 자녀들이나 여성이라는 생명적 조건을 갖고 태어난 대다수의 청년들 말이다. 사회경제적 조건이 취약한 대다수 청년들에겐 자유와 선택이 없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스스로 처한 경제조건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기억상실로 인해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긴지나 부모님에게 벗어나 자유를 갈구하지만 결국 호스트 같은 변변찮은 직업을 전전하는 아키미쓰, 두 주인공들의 삶의 궤적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긴지의 경우 원래이름은 가즈키 유타이다. 그는 남들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가정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돌변으로 가정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결국 유타는 그 속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지 못하며 자신을 지지해줄 기반이 사라져버려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할 수 없어졌고 결국 공장으로 일을 할러 나가게 된다.
  
가정 붕괴부터 공장으로 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 보이는 유타와 그 주변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청춘을 착취해 자라나는 일본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흔히 일본을 경제대국이라고 생각한 보통의 사람들에게서  화려한 얼굴 속에 과연 이게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현실인가 할 정도로 놀라운 묘사들이 곳곳에 보인다. 

반 빈곤 활동가인 ‘유아사 마코토’는 일본은 이미 ‘미끄럼틀 사회에 진입했다.’고 말한다. 한번 미끄러지면 더 이상 그 밑에서 올라올 수 없으며 어떠한 사회적 안전망에 의해 보호도 받을 수 없다고 말이다. 가즈키 유타를 통해 드러낸 일본의 민낯은 적확하게 일본을 보여준다. 가즈키 유타가 공장에서 9시간 30분이라는 일을 해서 번 돈은 겨우 13만엔 수준이다. 그에 더해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각종요금을 내는 대다 더욱 악랄하게 버스를 통해 공장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버스 이용료까지 공제되는 어처구니없는 착취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결국 절망적 현실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꿈꾸다 자살을 택하지만 쉽게 죽지 못하는 유타에게 다시 돌아온 자리는 역시 무급인턴 자리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유타가 과연 잘못산 것인가? 유타의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9시간 30분 일을 하면서 다시 한번 대학에 입학해  멋진 화이트칼라가 되고자 한 작은 희망을 꿈꾸었을 뿐이다. 바로 우리 옆에서 등록금을 벌기위해 피자배달을 하다 사고가난 친구가 바로 유타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고 아직도 고진감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혹하는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자신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절망적 현실이 자신의 책임으로 스스로 해결 해 나갈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이 없어선 안 된다. 하지만 지금 현재 비정규직 문제와 노동에서 소외받는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문제해결책은 스스로 강구해선 절대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걸 알기에 어쩔 수 없잖아. 혼자 할수 있는 걸해야지” 라고 위안하며 자기연민에 빠진 청춘들에게 ‘메타볼라’는 너희들의 그 헛된 노력의 굴레 속에서 얻는 것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아니라 또 ‘다른 공포의 시작일 뿐이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