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뤠~쓰! 우리에게 스트레스 받을 일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아니, 스트레스 없이 지나가는 날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담배 한 대가, 누군가는 소주 한 모금이, 누군가는 친구와의 수다 한바탕이 절실해진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것 말고 날 위로해주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나만의 장소’다.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장소라니? 어릴 적 동화에서 보고 줄곧 꿈꿔왔던 다락방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비밀 아지트를 말하는 건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나만의 장소’ 되시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해외여행이나 하다못해 근처 바닷가라도 가는 것이겠으나 돈과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은 쉽게 갈 수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미용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물어봐서 짧게 잘라달라고 했죠
어렵게 기른 머리카락을 왜 자르느냐며 또 한 번 물어요
그래도 잘라 주세요 제발
길었던 추억들 모두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데이라이트 <머리를 자르고> 中-


기분전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단연 ‘미용실’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과 적은 돈(이건 점포마다 다르겠으나)을 들여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오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

이종하 씨(28)는 “기분이 우울할 때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른다”고 했다. “남자들은 머리가 금방 자라기 때문에 (미용실을 가는데) 크게 부담은 없다”고 말하는 그는 얼마 전에도 미용실을 다녀온 듯 짧은 머리였다. 

정송이 씨(24)는 “머릿결이 상할까봐 자주는 못 가지만 확실히 미용실에 가면 기분전환이 된다”고 했다. 정 씨는 “머리를 하는 동안은 ‘어떻게 변신할까’에 집중하느라 다른 잡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머리를 하고 난 뒤 결과도 좋으면 그것만큼 상쾌한 일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실제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심경변화가 있을 때 미용실을 찾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신사의 품격에 임태산(김수로 분)이 홍세라(윤세아 분)와 싸우고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미용실을 찾았듯이, 하이킥3에서 박하선이 자신을 무시하는 학생들을 제어하지 못해 교장 선생님께 혼나고 기분 전환을 위해 미용실을 찾았듯이 말이다.
 

<노래방>
난 혼자 오락실 동전노래방 들어가 널 생각하며 슬픈 노랠 불러
갑자기 흙비 같은 눈물 흘러 내 눈물 촛농보다 뜨겁게 흘러
난 슬픈 고통 속에 살어 난 버스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아 힘없이 내 머릴 기대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우리 행복했던 그때를 생각해
– 스노필 <너를 보내며> 中


그런가하면 노래방 역시 기분전환에 빠질 수 없는 장소다. 김민지 씨(22)는 노래방을 찾는 이유를 ‘남들 눈치 안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씨는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세상 이별노래가 다 내 얘기 같다고 하는 게 진짜더라”며 “그렇다고 버스에서나 길가다가 울 수는 없으니까 노래방에 가서 슬픈 노래 부르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기분이 좀 나아졌냐는 말에 그녀는 “처음에는 우느라고 반주만 켜놓고 부르지도 못했는데 우는 것도 지치더라”며 “어차피 (노래방에서) 나가야되니까 울었던 티 안내려고 일부러 신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정말로 신나서 서비스까지 다 받고 나왔다”며 웃었다.

곽민주 씨(24)는 “고 3때, 공부가 너무 안돼서 친구들과 오후 자율학습을 째고(?) 오락실 노래방에 간 적이 있다”며 “그렇게 막장은 아니어서 딱 천원어치만 부르고 교실로 돌아왔는데 그 잠깐이 너무 즐거웠다”고 했다.

그는 굳이 노래방을 선택한 이유를 ‘간섭을 받지 않아서’라고 했다. 곽 씨는 “학교에서는 늘 선생님의 간섭에 시달리고 집에서는 부모님의 간섭에 시달리니까 자유가 부족했다”며 “넓은 교실에서 열 시간 있는 것보다 좁은 오락실 노래방에서 십 분 있는 게 더 자유로웠다”고 회상했다.

이렇듯 노래방은 남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부장님 맞춤 공연을 펼쳐야 하는 회식자리를 제외한다면, 한국인들의 스트레스 해소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는데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여긴 정말 ‘나만의 장소’>
앞서 말한 미용실과 노래방은 기분전환이 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으나 나만의 장소라기엔 국민적인 곳이다. 물론 ‘나는 XX미용실에 왼 쪽에서 세 번째 의자가 내 자리야’라거나 ‘나는 우리 집 앞의 OO노래방에 5번방만 가기 때문에 그 곳은 나만의 장소야’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보통 우리는 단골 미용실의 아무 의자에나 앉아 머리를 하고, 단골 노래방에 빈 방 아무데나 가서 노래를 부른다.

다시 말해 ‘미용실’과 ‘노래방’은 장소가 아니라 그 곳에서의 행위(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노래를 부르는)에 위로를 받는 게 크다. 이런 곳들 말고 장소 그 자체에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 곳에 가기만해도 힘이 불끈 솟고, 허전했던 마음이 따뜻해지는 진정한 ‘나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직장인 오유경 씨(26)에게는 퇴근길의 육교가 그런 곳이다. 오 씨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육교를 하나 지나야 하는데 사람이 잘 안다니는 한적한 곳이다. 퇴근시간 즈음에 육교 위에 오르면 도시 저편으로 석양이 지는 게 보이는데, 힘들게 동산에 오르지 않아도 멋진 광경을 보며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며 이곳을 나만의 장소로 뽑았다.

같은 동네에서 쭉 살아 온 김지혜 씨(24)는 생각이 많아질 때면 놀이터로 향한다. 김 씨는 “어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뛰어놀던 곳이라 그런지 놀이터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고 걱정이 사라진다”며 “그네에 앉아서 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 생각도 하면서 ‘걔네들도 지금쯤 나랑 똑같은 고민하고 있겠지’ 싶고, 그러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고 했다. 그에게는 동네 놀이터가 나만의 장소인 셈이다. 

장소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Carter, Donald, Squire의 논문에 따르면 장소는 ‘단순히 존재하는 사물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눈과 마음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며, 의미가 부여된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연구를 한 Canter 역시 장소란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이 투영되어 특정한 의미가 부여되며, 인지적, 감정적으로 인식되는 공간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두 정의에서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의미가 부여된 공간’은 장소가 단순한 공간,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매일 고달프고 단조로운 일상에 시달리는 이들이여, 지금부터 ‘나만의 장소’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날 위로하는 공간은 의외로 내가 퇴근하는 길이나 동네 놀이터에서처럼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믿어보라. 장소는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