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20대와 존댓말 기획’은 20대가 일상적으로 당면하는 ‘존댓말’과 ‘호칭’의 문제를 살펴보고,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우리말의 존비어와 호칭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함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1편 20대, 매일매일 존댓말/반말로 고생한다. 2편 존댓말 내부에 숨겨져 있는 나이의 신분관계, 3편 존댓말/반말이 가로막는 사회 소통과 해결책 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20대와 존댓말 기획 1편 ‘20대, 매일매일 존댓말/반말로 고생한다.’는 이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버젓이 성인인 학생에게 보자마자 반말이라니요.” 어른들의 ‘다짜고짜 반말’에 대한 생각을 묻자 대학생 황종남씨(26)는 기다렸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물론 반말이 친숙함의 표시일 수는 있죠.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무시 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존댓말과 반말의 기준이 ‘나이’여서는 안 되는데, 어른들은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시대의 변화에도 그렇게 가다간 결국 나이 많은 사람과 나이가 적은 사람들 간에 갈등만 늘어나지 않을까요?”




이것은 비단 황종남씨만의 생각은 아니다. 초면에 연장자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생각이다. 이 때 대부분은 속으로 욕 한 번 하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반면에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청소년 인권단체를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 나이라는 무기를 갖고 권력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청소년 인권운동가 공현씨, 최봉영 한국항공대 교수가 그들이다. 그들은 먼저 권력의 시발점으로 우리말의 ‘존비어체계’ 자체를 문제 삼는다.

 




호칭, 존댓말과 나이주의


공현씨가 한겨레21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그가 활동하는 청소년 운동단체에서는 “20대인 회원인데도 초등학생과 서로 반말을 하고, ‘언니’나 ‘형’ 같은 호칭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나이 차이가 몇 살이 나든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호칭과 말투는 서로의 상하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하관계 아래서는 “각기 다른 역할을 요구받으며 차별이” 허용된다. 청소년 운동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상하관계와 그에 따른 차별, 억압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나이주의’라고 부른다.”



나이주의는 최근에 와서야 생겨난 용어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나이 든 사람들을 어떤 틀에 놓고 정형화하거나, 차별화하는 형상(버틀러, 1975)을 일컬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와 연소자 차별을 나타내는 말로 범위가 확장됐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나이주의를 문제 삼지 않은 까닭은 ‘장유유서’를 우리의 전통이자 덕목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의 발원지인 중국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어의 존댓말은 친밀도에 따라 쓰는 것이지, 상하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늘 말단에 있는 언어는 한국어뿐이다. 이런 언어가 나이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형, 누나라고 말하는 순간 ‘동생’역할: 호칭의 유사가족주의

나이 많은 어른은 자신보다 어린 아르바이트생에게 “아메리카노 좀 줘”라고 반말로 명령할 수 있다. 아르바이트생은 군말없이 어른의 명령을 수행한다. 같은 아르바이트생 간에도 나이에 따라 하는 일이 달라진다. 가장 나이가 어린 아르바이트생은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왜냐하면 나이 어린 아르바이트생에겐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이 ‘언니’거나 ‘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니’와 ‘형’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언니’와 ‘형’이라고 부르게 함으로써 나이어린 아르바이트생에게 말 잘 듣는 동생의 역할을 강요하고 기대한다. 이 역할에서 벗어나는 순간 갈등이 벌어진다.



이런 가족 역할 놀이에 심취한 나머지 몇몇 사람들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지나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대학생 김 모씨(23)는 지난 10월 자신이 일하던 편의점에서 큰 봉변을 겪었다. “제가 일하던 편의점에 어떤 아저씨가 자주 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내 딸 같다고 말을 걸더니, 어느 날 와서는 내 손등에 뽀뽀를 하고 사귀자는 식으로 얘기했어요.” 그 아저씨는 대학생 김 모씨에게 딸처럼 순종적이고 복종하는 역할을 기대했다. 그녀가 어리고 아르바이트생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김 모씨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 아저씨를 피해 편의점을 관두어야만 했다.



한국어의 호칭에는 유난히 가족개념이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가족호칭은 어떤 역할을 부여할 뿐 아니라,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한다. ‘동생’이 ‘언니’를 도와주지 않거나, ‘딸’이 ‘부모님’의 애정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면 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우리나라처럼 당사자에게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 나라는 없다. 이름이 실종되고 ‘오빠’, ‘언니’, ‘형’, ‘누나’라는 호칭과 관계만 있을 뿐이다. 관계가 제거된 온전한 ‘나’는 설자리가 없고, 기대하는 역할로 불린다.




21세기에도 ‘신분관계’만드는 존댓말

최봉영 한국항공대 교수는 오래 전부터 위와 같은 문제에 주목했고,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 존비어 체계와 형식적 권위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이런 이 문제를 공론화 시켰다. 그는 나이, 선후, 직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상하관계 속에서 사용되는 존비어 체계가 결국 ‘유사 신분관계’를 끌어들인다고 보았다. “존비어는 상하를 엄격하게 구분시켜 주기 때문이다. (중략) 한국인은 상대를 만나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이, 직위, 서열 등을 따라서 존비를 구분하고 말투의 높낮이를 정한다. 모든 일은 말투의 높낮이를 기준삼아 행해진다.”



최봉영 교수는 “사람들이 존재를 파악하는 일은 주로 모국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나 직장에서 20대는 대부분 누군가에게 존댓말을 써야하는 입장이다. 즉 늘 누군가를 존대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소리다. 그에 반해 상대방에게 존대를 받는 일은 드물다. 20대는 ‘장유유서’에 따라 반말을 듣는, 들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우리의 존비어체계 속에서 20대는 늘 누군가를 존대하고 따라야 하는 존재로 굳어지고 있다. 그리고 20대 스스로도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그러한 존재로 사회 속에 위치시킨다. 20대는 언어에서 시작해, 모든 사회적 문제에서 약자가 되는 것이다.



20대와 존댓말 기획 ③편에서는, 존댓말이 가로막는 20대의 친구관계, 취업문제, 의견교환의 한계를 살펴보고 해결책을 골몰해 봅니다. (링크) – 9월 14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