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독립기념일!

성인이 된 20대가 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독립기념일’은 가상의 화자 ‘나’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연재 소설입니다. ‘나’의 독립 스토리를 통해 20대의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20대의 독립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오빠,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헉, 얘가 왜 이러지?


지난 번 그 ‘치한 사건’이 있은 후로, 알바가 같이 끝나는 날이면 항상 채영이를 데려다 줬다. 처음에는 걱정이 돼서 그랬지만, 사실, 채영이랑 같이 걸어가면서 얘기도 하고 그전보다 훨씬 친해졌다. 내가 별 거 해주는 건 없지만 지켜준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하고…… 나는 점점 대담해져 내 알바가 없는 날에도 가끔 가게 앞에 가서 채영이를 기다리곤 했다. 채영이는 처음에는 좀 놀란 듯 보였지만, “학교 끝나고 가다가 우연히……” 라는 나의 다소 찌질한 답에도 까르르 웃어 주었다.


물론 속으로 생각했던 말은 많았다. 채영아, 넌 웃는 게 너무 예뻐, 라던가 네가 신나서 고개를 크게 끄덕일 때 머리카락에서 좋은 냄새가 나, 너네 집이 더 멀었으면 좋겠다, 뭐 이런 것들. 그렇지만 이걸 내가 입 밖으로 낼 수 있을까…… 집까지 가는 길은 항상 분위기가 좋았지만 채영이는 대문 앞에 당도하면 ‘오빠, 담에 봐요.’ 하고 뒤도 한번 안돌아보고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할 말이 없냐니, 혹시 이거 뭔가 암시를 주는 건가? 아니, 괜히 나 혼자 뻘짓했다가 지금 이런 관계마저 망쳐버리면 어쩌지?


“…… 응? 뭐가?”


다소 찌질하지만 널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 라고 생각하며 일단 모른 척 했다.


“음…… 알았어요. 오빠 할 말 없으면 나 이제 들어갈게요. 안녕.”


안녕이라니, 채영아, 왜 평소처럼 담에 보자고 안하니. 혹시 영영 안녕이란 말인가?!


“오빠, 무슨 생각해?”


“으응? ㅎㅎㅎㅎㅎㅎ 니 생각 ㅎㅎㅎㅎㅎㅎㅎㅎ”


“아, 뭐야아~ 이상하게 웃어~”


아, 그때 눈 딱 감고 채영이를 다시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학교 앞 벤치에 앉아 같이 마주보고 웃는 일은 없었겠지.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 했지만, 채영이는 개떡같은 내 고백을 찰떡같이 들어 주었고, 우리는 그 날부터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여자친구! 애인! 채영이도 실은 나를 좋아한대! 2주 전의 그 날 이후로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가게에 알바를 해서 그런지 매일매일 만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하루하루 서로가 더 좋아졌다.


“오빠 나 추워.”


“어, 추워? 이제 그만 갈까? 내가 데려다 줄게.”


날씨가 벌써 쌀쌀해져서 해가 지면 꽤 추웠다. 아마 좀만 더 지나면 밖에서 시간 때우는 건 사실 더 어려워질 것이다. 오늘은 학교에서 같이 학식을 먹고 벤치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지만, 요 2주 동안 나 혼자라면 생전 안갈 카페도 많이 갔다. 연애를 하려면 둘이 시간을 보낼 공간이 필요하고, 공간을 사용하는 데는 돈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커피값을 내고 공간을 사용하는 곳이라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지난 주말에는 그래도 데이트 다운 데이트도 하고 싶어서 극장에 영화도 보러 갔고…… 영화만 보기 뭔가 허전해서 콜라랑 팝콘도 살까 했더니 금세 3만원이 훌쩍 넘었다. 채영이가 극구 배가 부르다며 싫다 해서 결국 콜라만 샀지만…… 팝콘도 맘 놓고 못 사는 처지지만 이번 달 생활비는 벌써 거의 다 떨어졌다. 확실히 연애를 시작하니 아낀다고 해도 돈이 많이 들었다. 나 혼자야 고시원에 일찍 들어와서 라면이나 먹어도 되지만, 채영이와 함께 밥을 먹으려니 어김없이 사먹어야 했고, 그렇게 비싼 음식을 먹는 게 아닌데도 꽤 부담이 되었다. 어김없이 채영이를 데려다주고는 집에 와서 통장 잔고를 계산해보면 스멀스멀 걱정이 기어올라왔지만, 곧 ‘오빠, 잘 들어갔어?’ 하는 채영이의 카톡에 헤벌쭉 웃으며 답장을 하다보면 까무룩 잠이 들어 어느새 또 새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었다.


벤치에서 일어나려는데 반팔 원피스 밑의 채영이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추웠단 말야? 아, 어쩌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도 앉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내 손바닥을 채영이 팔에 갖다 대었다. 채영이는 갑자기 양 팔을 잡히니 깜짝 놀란 눈치였다. 나도 이러려던 게 아니라 제풀에 놀라서 가만있는데, 꼭 껴안기 직전처럼 둘이 가까웠다. 속눈썹이 가지런히 난 갈색 눈동자 두 쌍 위로 내 머리가 만든 그림자가 졌다. 나는 어느새 벤치 주위가 어느새 고요해진 것을 깨달았다.

출처 ; http://ipuris.net/textcube/tag/%EB%82%A8%EC%9D%B4%EC%84%AC


참 부드럽구나. 입술이 떨어지면서 든 생각이었다. 눈을 떠보니 채영이는 놀랍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만 눈 감은거야?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내 생애 첫키스를 하자마자 생긴 소원이었다.


“한 번만 더 하면 안돼?”


채영이는 풉, 하고 웃더니 이번에는 눈을 꼭 감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