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수님, 시험 문제가 매년 똑같아.” 중간 고사를 앞두고 시험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선배에게서 종종 듣게 되는 소리다. 그 말에 후배들은 귀가 쫑긋할 수밖에 없다. 시험 문제가 매년 같다는 얘기는 이번에 볼 시험에서 작년에 나온 문제가 그대로 나올 수 있다는 얘기고, 작년의 문제를 알면 이번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혹시 작년 시험문제 아세요?”

후배의 물음에 선배는 ‘족보’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어떤 문제가 시험에 나왔는지, 교수님이 시험에 반드시 출제하는 개념은 무엇인지 정리된 문서다. 선후배 사이로 대를 이어 내려오다보니 ‘족보’라는 이름이 붙었다. 

 
10월 중순, 어느새 대학가는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다. 각 대학가에서 족보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족보, 선배에게 전수받는 건 옛날 얘기. SNS로도 다운받아

 

 

 

컴퓨터 공학과에 다니는 신입생 L씨는 선배에게 족보를 받았다. 과 특성상 시험 범위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아 족보는 큰 도움이 된다. 다른 친구들도 똑같이 다 받은 건 아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과 안에서 족보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포함한 극소수다. 자기에게 족보를 준 과 선배도 같은 과 선배에게 이 족보를 물려 받았다. 족보에는 기출 문제, 해설이 들어 있었다. 기출 문제 그대로 시험에 나오진 않았지만 공부하기가 훨씬 편했다.


이젠 인터넷에서 쉽게 족보를 구할 수 있다. 레포트, 이력서, 자기소개서 등 대학과 취업 전반에 관한 정보 공유와 자료가 있는 사이트 ‘해피캠퍼스’의 경우는 시험 자료가 1만 건 이상에 달한다. 다음, 네이버의 유명한 대학생 커뮤니티에도 족보를 공유할 수 있는 카페가 개설돼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커뮤니티에서도 족보를 구할 수 있다. 서울 소재 S대학교의 경우, 게시판 한 켠에 따로 족보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다. 어떤 대학교는 커뮤니티 회원이라면 누구나 열람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자신도 족보를 올려야 족보를 내려 받을 수 있는 구조도 운영되는 곳도 있다. 족보를 올리면 포인트를 쌓고, 그 포인트만큼 다시 족보를 다운받는 식이다. 현재 족보를 전수받는 통로는 SNS까지 확장됐다. 페이스북 내의 비공개 그룹에서 족보 파일을 공유하거나, 자신이 구한 족보를 올려 친구로 등록된 사람끼리 다운받을 수 있게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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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족보가 공개적으로 공유되기도 한다. 몇몇 학교의 경우, 전산실이나 복사실, 교내 서점에 족보가 구비되어 있다. 강원도의 K대학교를 다니는 K씨는 “몇몇 강의의 경우 교내 서점에 족보가 있다. 구매해서 공부를 했는데 이 때까지 어떻게 시험이 나와있는지 모두 나와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서점에 비치되어 있다보니 많은 학생이 족보를 구매해서 공부하곤 한다”고 밝혔다. 

 

 

 

 

 

족보가 암암리에 성행하다보니 이를 눈치챈 교수들이 족보를 아예 학생들에게 공개하기도 한다. 학교 커뮤니티 자료실에 올려두거나, 강의 자료실에 미리 족보를 올려두는 식이다. 이 경우 이 때까지 시험 문제를 답 없이 공개하고, 시험에는 살짝 다른 유형으로 출제하고는 한다. 서울 소재 S대학교 교수는 중간고사 때 족보가 암암리에 돌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기말고사 때 자신이 직접 족보를 공개해버렸다. 

 

 

 

 

 

 족보, 많이들 사용하지만 대체로 부정적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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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알바천국에서 대학생 680여명에게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40%정도가 족보를 얻어 공부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총 43%가 부정적 의견을, 35%가 긍정적 의견을 보였으며 21%의 학생이 족보 자체보다 같은 문제를 내는 교수들의 잘못이 있다고 답변했다. 특히 “단순 주입식 공부 방식이다 보니 학생들의 창의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은 2009년 2월 초 정시 합격생들을 대상으로 한 서울대 강연에서 이준구 교수가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 이준구 교수는 “학점이 나빠도 스스로, 진취적으로 공부하라. 족보에 의존해 공부하지 말고 책을 광범위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K대학교에 다니는 C씨의 경우도, “족보가 모두에게 공개된 경우라면 상관 없지만 암암리에 도는 경우는 몇몇 학생만 시험을 잘 보게 된다”며 족보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보였다. K대학교 J씨의 경우는 “과에서 학생회, 소모임은 족보를 빌미로 학생들을 구하기도 한다. 강의의 족보를 줄테니 가입하라는 것이다. 시험에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학생회, 소모임의 유지에도 건전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성상 족보가 필요한 과목도 있어… 시험 방식이 먼저 개선되야

 

 

 

하지만 족보는 때로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의대같은 경우나 이공계열은 시험범위가 너무 많아 내용 요약본이 없으면 공부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족보는 시험 경향을 담은 것 뿐만 아니라 ‘요약 노트’처럼 정리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족보는 분명히 공정한 시험에 방해가 되는 요소다. 조교나 선배와의 친분을 통해 얻었을 경우,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아무래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커뮤니티에 공유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커뮤니티를 통해 족보를 얻지만 커뮤니티에서 활동하지 않는 학생은 족보의 존재자체도 모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주어지고, 누군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족보의 특성은 공평한 자리에서 출발해야할 시험의 규칙에 어긋난다.

 


하지만 족보의 공유를 막는 것이 좋은 방안은 아니다. 족보의 공유를 금지한다고 해도 암암리에 족보는 떠돌게 되어 있다. 오히려 수많은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지금보다 더 불공평해질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족보가 필요 없는 시험을 만드는 것이다. 족보가 유용한 이유는 매년 시험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문제가 같다면 작년 시험문제를 알고 있는 것은 답을 알고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험이 끝나고 난 뒤 “족보에 나왔던 그대로 시험에 나왔더라”와 같은 말이 생기지 않도록 시험이 출제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족보가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을 제대로 배웠는지를 체크하는 시험의 특성상 매년 판이하게 시험 문제가 바뀌기는 어렵다. 서술형이 많은 인문계보다 이공계열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출제 경향을 직접 모두에게 공개해 불공평할 소지를 없애야 한다.  

 


장학금과 취업을 위해 학점은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다. 그 학점이 학생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냐가 아니라 어떤 선배를 알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족보를 구했냐와 같은 요소에 좌우되면 안 된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을 뿐더러, 학생들에게 정당한 노력보다는 “꼼수”가 더 도움이 된다는 잘못된 교훈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