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20대는 특별하다. 20대가 주는 직관적 느낌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사회구조적 환경 하에서 20대는 분명, 어느 세대보다 자유를 품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을 자신이 정하고, 자신이 밀고 나갈 수 있다. 설사 그 꿈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향후 인생의 토대가 된다. 20대를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준비했다.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대선 주자도 ‘누구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20대는 특별하고 각별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치장된 현재의 모습은 잠시 접어두자.  온 몸으로 삶을 살아가던 20대 시절의 그들을 되짚어보았다. 대선주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느껴보고자 했다. 고함 20이 준비한 ‘대선후보의 20대 기획’이다.


[대선후보의 20대① 문재인] 화끈하진 않지만 뚝심있게 걸어갔다
 

입시, 연애, 대학생활, 군대, 취업. 20대가 5가지 단어로 정의될 리 없건만 대학진학율이 80%에 육박하는 21세기, 대부분의 대한민국 20대에게 입시는 첫 관문이요. 취업은 마지막 관문이다. 그리고 연애, 대학생활, 군대가 20대 남자의 중간을 관통한다는 것도 거짓은 아니다. 5가지 단어가 20대의 모든 것을 포괄할 수는 없지만, 이 5가지를 중심으로 20대를 되돌아봐도 무리는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딱 40년 전 1972년. 문재인 후보도 입시를 통해 자신의 20대를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과 다를 것 없던, 문재인의 입시



‘학교 다니는 내내 역사과목이 가장 좋았고, 성적도 좋았기에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당연히 역사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했다. 성적은 법대와 상대에 갈 수 있었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었다가 입시에서 실패. 결국에는 재수를 해 경희대 법대에 진학했다. 


출처-문재인 후보 트위터


지금도 역사를 좋아한다는 문재인 후보의 대학입시의 전부다. 어른들의 입김이 쌨던 것도, 성적에 맞춰 학과와 대학을 선택했던 것도. 21세기와 똑같다. 문재인 후보의 입시는 지금과 다를 게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대학생활은 지금과 분명 달랐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년도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해다.



 암울한 시대, 학생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10월 유신과 함께 전국의 대학이 들끓었지만 경희대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것 같다. 문재인 후보는 경희대에 운동 중심 세력이 없어 학생운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 자신도 하숙 친구들과 시국 사건 이야기를 하는 게 다 였다고 말한다. 서울대와 고려대 시위를 구경가기도 했다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었다. 



암울한 70년대, 그 역시 리영희 선생을 거쳐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당시 ‘창작과 비평’에서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 논문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명쾌한 논리가 놀라웠고 미국의 허위를 밝혀준 게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리영희 선생의 책과 논문을 통해 지식인의 추상과 같은 자세를 만났다고 기억한다. 이후에 펼쳐질 학생운동에 어느 정도의 밑거름이 됐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3학년(1974). 드디어 문재인 후보는 뜻이 맞는 주변 친구들과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했다. 재단퇴진 농성을 중심으로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한 것인데 그 시위에서 그는 직접 선언문을 작성하고 읽기까지 했다. 학생운동이 미미했던 경희대에서 그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계기다. 



학생운동을 늦게 시작한 감이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유신정권과의 전면전 분위기가 무르익은 1975년에는 친구들과 총학생회 선거에 뛰어들어 성공한다. 당선과 함께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고 바로, 비상학생총회를 개시하는 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시국토론과 유신독재 화형식을 거행한 이 총회로 제적과 함께 그는 구속이 됐다. 한창 화제가 됐던 특전사 시절의 시작이다.  
 

 가야되니까 갔던 군대



 문재인 후보의 책 ‘운명’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20대를 매우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흥분도 좌절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 사실, 책 전체를 통틀어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내용이 담담하다. 그의 성격 자체가 담담하기에 그런 것이라 추측해본다.

 
뉴시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후보가 군입대를 매우 담담하게 생각했다는 점도 새로울 게 없다. ‘군복무는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복학이 언제 될지도 모르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의 성경이 드러난다. 훈련소 수료 이후, ‘특전사령부’ 배치 구절에 이르러서도 그때 심정에 대해선 별 서술이 없다. 오히려, 특전사로서 받은 고된 훈련에 대해서도 그는 ‘무장구보만 어찌어찌 넘기면 나머지 교육훈련은 할 만 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다만, 지금 아내가 된 그 당시, 여자 친구 얘기가 재미있다.



 엉뚱한 밀회의 연애사.



 처음 만남은 축제였다. 우연히 만나 즐겁게 놀고 헤어졌다. 그 이후로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눌 뿐. 그리고 75년 비상총회로 구속됐을 때 면회를 왔다고 한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재인 후보도 뜻밖의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문재인 후보가 야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야구소식이 있는 뉴스를 가지고 면회를 왔다고 한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 소식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마는 문재인 후보는 엉뚱한 그 상황을 생각하며 간혹 웃었다고 한다. 

 




 군대 때도 이런 면회는 이어졌는데 한층 더 엉뚱해진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면회를 온다고 하면 가장 기대하는 게 먹거리다. 군대에서는 못 먹을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기를 기대하면서 면회 장소로 나간다. 문재인 후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안개꽃만 한 아름 들고 왔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여자친구는 고시 공부를 하는 곳으로 면회를 오곤 했다는 데. 문재인 후보가 밝힌 연애사만을 봤을 때 그 자신의 말대로 아내와의 연애는 밀회의 역사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운명을 만들다.



 1978년 제대한 문재인은 사법고시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변호사 출신이다) 제대와 함께 기업체 취직을 생각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였다. 제대 후 별로 되지 않아 쉰아홉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그는 아버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라도 그냥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우연이었지만 사법고시를 선택하는 그는 그 길로 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고 1979년 초 1차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며 새로운 시대는 시작되고 있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고 대부분의 대학교에서는 복학이 이뤄졌다. 그 당시 대부분의 대학교에서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면서 문재인 후보도 복학과 함께 학생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그는 2차 사법시험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응시하게 된다.



 그 후 신군부의 비상계엄이 발령된 5월 17일, 그는 여자친구와 강화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구속되고 만다. 구속사유는 계엄포고령 위반. 시위 전력이 있었던 그를 경찰이 추적해서 잡아온 것이다. 그날로 그는 유치장에 수감되는데 황당하게도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사법시험 합격 소식이 날아온다. 문제는 구속이 되면 합격이 취소된다는 것이었다. 아직 3차 면접이 남아있어서 구속이 되면 합격이 취소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희대 대학원장이던 육사 1기 김점곤 교수 덕택에 그는 석방됐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2차 시험 합격사연도 흥미롭다. 그가 본 시험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문제가 나와 공부를 덜 한 그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했던 것.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운이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사법연수원에서 그는 매우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할 당시 차석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랬던 그가 변호사가 된 이유는 시위 전력 때문이다. 그 자신도 판사를 원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인해 검사나 변호사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검사보다는 변호사가 나을 것이라고 판단 그는 변호사의 길을 택한다.



 사법 연수원 졸업 이후, 그는 사법연수원 차석 졸업으로 로펌 제의를 받기도 하지만, 연수원 동기 박정석에 의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개받는다. 당시 박정석은 변호사로 임명되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동업할 예정이었는데 검사로 임명 받는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문재인 후보를 추천하게 된 것이다. 문재인 후보도 로펌보다는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되고 그 것이 그 둘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때가 1982년. 문재인 후보가 만으로 30이 되던 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우연과 우연이 모여 운명이 시작된 시점이다.



화끈하지는 않았다. 다만, 선택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지금도 그렇다.



 5가지 단어를 중심으로 풀었지만 문재인 후보의 20대를 관통하는 것은 암울한 시대였다. 찬찬히 훑어보면 사법고시 준비 계기를 제외하고 시대적 상황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문재인 후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대신, 물러서진 않았다. 자발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선택한 바에 대해서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튀지 않고 담담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한 바를 지키고자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선후보가 됐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그를 불러냈다. 초반에는 약하다는 이미지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뒤지고 있지만 물러섬이 없다. 안철수 후보와 박근혜 후보, 누가 나오든 이길 수 있다고 그는 자신 있게 말한다. 



 20대의 문재인과 지금의 문재인이 겹쳐 보인다면 이상한 우연일까. 화끈하지는 않지만 선택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20대의 문재인을 보며 대선후보 문재인이 보였다. 

자료출처-문재인의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