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야구장을 찾았다.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야구장 역시 국민들의 여가·놀이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이제 야구장은 단순히 경기 관람의 장소가 아니다. 가족 또는 지인들과 신나게 응원도 하고, 음식을 곁들이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변신하고 있다.

그러나 야구장의 ‘좋은’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선수들의 좋은 플레이, 치어리더들의 활약, 관중들의 열띤 응원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이들이 제 역할을 해줬기에 가능했다. 오늘 만난 고은지씨(인하대학교 언론정보학과 4)도 문학야구장에서 2년 동안 ‘띠 전광판’ 관리자로 일하면서 프로야구 흥행에 일조한 ‘숨은 공로’가 있었다. 문학야구장에서 경기가 있을 때마다, 직접 만든 응원 문구, 응원가 가사, 관중들이 보내는 문자 등을 띠 전광판에 띄우면서 관중들의 흥을 돋우었다.

월요일, 한국시리즈 4차전 경기 직전에 고은지씨를 만났다. 올해 문학야구장 마지막 경기임과 동시에, 그에게 있어선 마지막으로 띠 전광판 관리자로 일하는 날이었다. 인터뷰 직후 SK가 승리한 것을 보고 그에게 전화를 하니, 기분 좋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고은지씨

Q. 띠 전광판 관리라는 생소한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이 일을 원래 하던 과 선배가 외국에 가게 되었어요. 후임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제가 하겠다고 지원을 해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원래 SK팬이라서, 야구를 보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렸어요. 2011, 2012시즌 내내 일하다가, 취직 준비 때문에 내년부터는 일을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오늘이 띠 전광판 관리자로서 마지막 날이에요.

Q. 그동안 어떤 일을 하셨는지, 띠 전광판 관리일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3루 쪽, 홈팬들이 보기 좋은 위치에 긴 전광판이 하나 있어요. 그걸 띠 전광판이라고 하거든요, 저는 방송실에서 거기 있는 띠 전광판 송출을 총괄하는 사람이에요. 기본적으로 타석이나 마운드에 선 선수 정보, 이름이나 별명이 써져 있는 자막, 우리팀 (SK)응원문구, 선수응원가 가사 등을 올려요. 관중들의 문자도 받아서 이닝이 교체되는 동안에 올리고 이벤트 홍보를 하기도 하죠. 또 타구장 점수 상황 중계를 하기도 하고, 상황에 어울리게 이기고 있으면 더욱 신이 나는 문구, 지고 있으면 역전에 관한 문구를 올리기도 하죠.

Q. 문구를 직접 만드시는 건가요?

포토샵으로 제작을 해요. 띠 전광판이다 보니까 엄청 긴 띠 형식으로, 특이한 사이즈로 만들어요. 일상적으로 매일 쓰는 건 세심하게 만들고, 어버이날, 어린이날, 기업의 프로모션 데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재빨리 만들기도 해요. 또한 선수들 기록, 이를테면 20-20이라든가, 박재홍 선수 300홈런 같은 것에 대해서 축하 문구를 올릴 때도 있는데, 그런 문구를 올릴 때는 저도 같이 기분이 좋아져요.
 

띠 전광판의 모습

Q. 2년간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하루도 안 빠지고 갔다고 들었어요. 힘든 점은 없었나요?

크게 질 때는 야구장 분위기가 안 좋거든요. 집에 가고 싶지만 집에도 못 가고… 그렇다고 경기를 안 볼 수도 없고요. 지는 경기를 계속 지켜봐야 하니까 그 때는 정신적으로 피곤하죠. 특히 김성근 감독 경질 사태 있을 때 야구장 분위기가 굉장히 뒤숭숭했어요. 구단에서도 신경이 곤두서고, 경호인원도 늘어난 사태였는데, 보고 있는 게 힘들었죠.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힘든 점이 거의 없었어요. 사실 저는 편한 위치에서 야구를 보니까 매점이나 구단 물품숍에서 일하시는 분들, 청소하는 분들, 게이트 안내하는 알바분들 보다 훨씬 근무 여건이 좋거든요. 다만 응원 문자를 받다 보면 조금 황당한 경우는 있어요.
 

Q. 어떤 문자가 오던가요?

욕을 보내거나, 다른 팀 응원하는 것을 보내놓고(SK 응원문구만 틀어주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자기 문자 왜 안 보여 주냐고 따지면서 20통 이상 문자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스쿨데이라고 학교 애들 초청하는 날에는, 문자가 터져요. ‘1반 파이팅‘ 이런 게 올라오면, 2반, 3반, 4반도 전부 문자로 보내고… 아무래도 학생들이니까 욕 보내는 것도 많아서, 그걸 다 필터링 하는 것도 곤욕이죠.
 

Q. 방송실에 2년 동안 있었으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겠어요.

방송실에는 선수들이 들어올 일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 고참 선수가 메인 전광판에 뜨는 자기 사진을 바꿔달라고 요청하러 오신 거예요. 선수분이 직접 고른 사진을 가지고 들고서요. 문제는 사복 사진이었어요. 그래서 전광판 담당하시는 분과 고민하다가 결국 얼굴 부분만 잘라 유니폼에 합성했어요.

그리고 타팀 선수가 홍보팀을 통해 자신의 사진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던 적도 있었어요. 아마 ‘야구가 잘 안 돼서’ 예전 사진으로 바꿔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선수들이 타석에 들어설 때 타석에만 집중하느라 전광판은 전혀 안 볼 줄 알았는데 의외였죠.
 

Q. 선수들과는 교류가 전혀 없나요?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어요. 가끔 영상 찍는 분들 도와주러 갈 때 덕아웃을 지나면서 보거나, 구단 직원을 통해 싸인을 받거나 그런 적은 있었죠. 선수들하고 개인적 교류를 맺을 순 없더라고요.
 

Q. SK팬이잖아요. SK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셨는지

2008년에 대학교 들어와서 야구 좋아하는 동기를 만나면서 야구장에 몇 번 놀러가기 시작했어요. SK가 워낙 잘하는 팀이다 보니까 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집이 인천이고 학교도 인천이고 연고지다 보니까 더욱 애착이 갔죠. 그러다가 2010년에 SK구단에서 ‘그린 봉사대’라는 것을 모집해서, 1년 동안 구장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됐어요. 구장 내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주 경기를 보다보니까 당연히 팬이 될 수밖에요.
 

고은지씨가 만든 띠 전광판 문구들

 

Q. 방송실에서도 경기 응원하는 분위기가 있나요?

이기고 지냐에 따라 분위기는 달라요. 하지만 기록원들이랑 구단직원들이 오가는 곳이라 관중들처럼 응원할 수 없는 분위기에요. 이기면 박수 정도는 치는데, 역전을 당하거나 실책을 해도 짜증을 낼 순 없으니 혼자 삭히는 편이죠. 사실 거기 있는 분들 중에 10년 가까이 일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 분들은 매일 보니까 승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과 잠실이나 목동 같이 다른 구장에 가서 친구들과 치맥 먹으면서 경기 본 적도 있어요. 원정 가서 이기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Q. 수많은 경기를 봤잖아요, 인상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2~3년간 거의 매일 봤기 때문에 끝내기 홈런이나 대역전승과 같은 짜릿한 경기도 여러 번 봤어요. 그래서인지 경기적인 면으로 봤을 때는 어떤 게 기억에 남는다고 딱히 꼽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걸 꼽자면 6월 2일 김광현의 올해 첫 선발 경기였어요. 재활훈련을 한 후 올라왔는데 에이스 복귀전이라 해서 그 전부터 기사도 많이 나고 시끌시끌했거든요. 평소에도 관중이 많은 기아전이었던 것과 주말인 점도 한몫 했겠지만 입장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어요. 라인업 소개할 때 장내 아나운서가 김광현을 외치는데 함성이 한국시리즈 뺨칠 정도였고, 전광판 문자에도 김광현 보러 왔다고 응원하는 메시지가 상상 이상으로 쏟아지더라고요. 이 팀의 에이스가 ‘김광현’이며 많은 팬들이 에이스의 복귀를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크게 느낀 날이었죠.

그리고 앞서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지만 작년 8월 18일, 김성근 감독 경질 사태가 일어났던 날도 기억나요. 야구장에 가서야 소식을 접했고, 기우이길 바랐던 일이 사실로 벌어져 충격을 받았어요. 야구장 분위기도 매우 뒤숭숭하고 분노와 침울함이 섞인 느낌이었어요. 경기 중과 종료 후 그라운드 난입 등 여러 가지 사건도 발생했었죠. 그 날 이후로 시즌 끝날 때까지 (직원들이 있는)지하층 경비가 더 삼엄해졌어요. 관중석에서 항의하는 팬들도 거의 매일 보였고, 경호하는 사람들과 관중들이 대치하는 일도 많아졌죠.

Q. 그렇다면 일을 하면서 기분 좋았던 기억 없나요? 팀이 이긴 것을 제외하고

올해부터 선수 응원가 가사를 틀기 시작했거든요. 학교에서 알고 지내던 새내기 친구와 야구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전광판에 가사 틀어준 것 때문에 금방 응원가를 따라 부를 수가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뿌듯함을 느꼈죠.
  

 Q. 주변에 은지씨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많지 않나요? 경기를 항상 좋은 자리에서 ‘직관’ (직접관람) 하잖아요.

부러워하는 애들 있죠. 가끔 그 곳(방송실) 구경시켜 달라고 하는 애들도 있어요. 아무래도 야구가 인기스포츠이니까요 (웃음)
 
 

Q. 야구장 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잖아요. 야구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다고 생각해요?

WBC와 베이징올림픽 때문에 야구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것 같아요. 그리고 야구장에 대한 인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잖아요. 요즘에 아저씨들 무리보다는 여성 팬들이 오히려 많거든요. 구단에서도 실제로 여성 팬 대상으로 마케팅을 많이 하려고 하죠. 여성 팬들이 많으니까 외모가 뛰어난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진 것 같은데, 사실 야구를 잘하면 더 잘생겨 보이는 것 같아요.
 

Q. 오늘로서 구장 관계자가 아닌, 일반 팬으로 돌아가잖아요. 기분이 어때요.

제가 띠 전광판을 관리하는 마지막 경기니까 이겼으면 좋겠어요. (결국 SK는 4차전을 이겼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을 이야기하자면 시원섭섭하죠. 내년부터는 관중석에서 치맥과 함께 열심히 응원하고 싶어요.
  

Q. 봉사활동과 전광판 일을 통해 야구장에서 총 3년을 있었잖아요. 야구장에서 일해보고,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프로야구가 흥행하고 있으니까, 이 인기를 지속해나갈 방안을 마련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먼저 구장시설을 개선했으면 좋겠어요. 문학야구장은 시설이 좋은 편이지만, 대구야구장 같은 곳은 개·보수가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구장 시설이 좋아지면 아무래도 경기력도 좋아지고, 관중들도 편하게 관림이 가능하겠죠. 그리고 유소년 야구, 사회인 야구등도 활성화되어야, 더 좋은 선수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야구장이 주말 여가 코스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지자체에서 협력을 잘 해줘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