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러 가는 길, 노근리 사건 (NO GUN Ri)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1948.8.12.)

민간 주민 및 민간 개인은 군사 작전으로부터 발생하는 위험에서 보호되어야 하며 적대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는 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금지된다.


영동역에서 백두대간을 오른편에 두고 노근리학살 현장에 가기 위해
10km를 걸었다. 이 키로 쯤 걸었을까. 뙤약볕 아래 잠시 쉬기 위해 걸음을 멈춘 곳은 주곡리였다. 포도로 유명한 영동의 주곡리 마을은 포도의 향 때문인지, 벌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노근리 민간인 학살의 주요 희생자는 주곡리 마을 주민이다. 50여 년 전의 끔찍한 사건의 향수는 없고 명랑한 하늘 아래 주곡리 마을은 평화로워 보였다.


때는
19507월 한국전쟁 중이었다. 미군은 대전전투 패배 후, 721일 영동으로 후퇴했고, 풍년을 위해 김매기에 바쁜 임계리, 주곡리 마을에 피개령을 내렸다. 주민은 하천 변에 노숙을 하며 12일간 미군의 소개 명령 아래 남쪽으로 갔다. 서송원리 부근, 미군은 갑자기 경부철도에서 피난민의 짐을 수색했다. 미군은 어디론가 무전 한 후, 정찰기 한 대가 피난민의 머리 위로 선회하고 폭격기가 피난민을 향해 발포한다. 100여 명의 주민은 폭격기가 쏜 탄에 맞아 사지가 찢기거나 아이를 안은 채 죽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경부철도 아래 쌍굴다리 안으로 몸을 피했다. 미군은 폭격을 끝내지 않고 무고한 민간인을 향해 34일간 70여 시간 동안 발포해 주민을 죽였다. 몇몇 젊은 청년들은 도망을 갔지만, 노인, 여자,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을 향하는 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여아는 쌍굴다리 양쪽에서 날아오는 총탄이 무서워 죽은 사람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미 제25보병사단장 윌리엄 킨의 명령서(1950.7.27.)

이 지역에 보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

미 제1기병사단 제61야포대대의 전투일지(1950.7.29.)

이제부터 보이는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미군 제7 기병 연대 참전 군인 조지 얼리의 증언

저는 총을 겨누고 있던 사람들이 군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거기에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 상관없었습니다. 여덟 살이든 여든 살이든, 맹인이든 불구자든 미친 사람이든 상관없었습니다. 모두에게 총을 쐈습니다.”

 

주곡리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이 남쪽으로 떠난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들이 아픈 부모님을 지게에 이고, 울어 대는 갓난아이를 안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난 그 길, 지금은 2차선 도로가 됐고, 어디론가 가는 자동차들이 도로 위의 고요를 깰 뿐이었다. 피난민들의 발자취가 남은 길은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목적지로 가기 위한 좁은 차도일 뿐이다.


노근리에 도착해 노근리 유족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 한 어르신이 텔레비전을 보며 앉아 있었다. 유족회사무실엔 한 분만 있었다. 사무실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없다. 유족회 분들은 어디로 가신 걸까. 노근리 평화공원 일대를 둘러보았다. 큰 부지 위에 평화기념관, 위령비, 합동묘역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공원의 넓은 부지는 평화롭기보다는 휑한 느낌이다. 토요일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부지의 건물이 따사로운 햇볕에 지친 모습이다.

 

 

위령비에 묵념한 후, 쌍굴다리로 향했다. 한 굴은 차도고, 다른 한 굴 아래는 물이 흐른다. 쌍굴다리에는 ,,표시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세모 표시에는 노근리 학살 당시 미군이 발포한 총알이 그대로 박혀 있다. 동그라미 표시는 총탄의 흔적이고 네모는 세월이 흘러 시멘트가 분열돼 떨어진 건지 총탄에 의한 상처인지 불확실한 흔적이다. 쌍굴다리 아래로 흐르는 하천은 과거 핏물이 흐른 흔적은 없고, 송사리가 물속을 헤엄친다. 노근리 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에는 며칠씩 굴다리 아래 갇힌 주민이 아이가 우는 소리에 미군이 총을 쏜다고 하자. 아이의 아비가 아이를 하천에 익사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허구이다. 한 증언에 따르면 어미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꼭 끌어안다가 아이가 질식했다고 한다. 쌍굴다리아래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그들은 서로 이웃이었고, 가족이었다.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이신 정은용 선생님은 그날 가족을 잃었다.


정은용 선생님은 노근리 민간인 학살을 세상에 알리려 노력하셨지만
, 노근리 사건을 진상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미국의 원조를 받았던 대한민국에서 미군의 민낯을 드러낼 수 없었다. 반공을 국시로 내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 어려워졌다. 1999AP통신이 노근리 학살을 보도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자, 한국정부와 미국은 노근리 사건을 진상규명했다. 유가족의 노력으로 2004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사업이 추진됐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은 학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뿐, 노근리 사건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끝이 안 보이는 수직 갱도에 쌓인 유골들, 경상 코발트 광산 사건

우리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학살사건이 있다. 바로 경상 코발트 광산 사건이다. 한이 서려있는 코발트 광산을 찾아갔다. 1937년 일제강점기에 태평양 전쟁의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 경산 코발트 광산을 개척했다. 경산 코발트 광산은 한 개의 수직갱도와 두 개의 수평갱도로 이루어져있다. 일제치하 아래 대한민국 청년들이 징용되어 수평갱도에서 코발트를 캐어 수직갱도로 코발트를 올리는 강제노역을 했다. 식민지 때 조선 청년들이 피땀 흘린 이곳. 1957년에는 민간인의 피가 뿌려졌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은 노근리 사건과는 달리 우리나라 군인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었다. 사건의 주요 희생자는 대구교도소 수감자들과 국민보도연맹회원들이다. 정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우리나라 육군과 경찰은 수직갱도 위에서 민간인을 총과 둔기로 살해했다. 수직갱도는 무고한 사람들의 사늘한 시체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래서 일까. 수평갱도에는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직 이곳은 진상규명조차 안 됐다. 광산 근처에 골프장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면서 많은 유골이 발견됐다. 경산 코발트광산 유골발굴사업을 한 노용석씨에 따르면 골프장 측은 빨리 공사를 해야 하니 유골 수습기간을 짧게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끝나지 않은 유골발굴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공사 중 해골이 나와도, 골프장 이해관계자들에게는 방해물일 뿐이다.

 

현재 경산 코발트 광산 희생자의 유골은 충북대학교 임시 안치실에 있다. 안치실에 옮기지 못한 희생자들의 유골은 광산 옆 조그만 컨테이너에 있다. 유골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총상이 남은 두개골과 골반뼈, 척추뼈 등 그 당시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유골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부식되어 갔다. 시설도 중요하지만, 희생자의 죽음을 외면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노근리 평화공원 부지에 코발트 광산 희생자들을 안치하려 하자, 노근리 유족회는 빨갱이들과는 같은 무덤을 쓸 수 없다며 반대했다. 당시 반공이데올로기는 민간인 학살을 양민학살과 빨갱이의 죽음으로 나눴다. 그 속에는 반공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서려 있다. 코발트 광산 학살을 외면하는 정부나 학살 유족,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골프장 쪽이나 매몰차기만 하다. 아직도 반공이라는 유령은 우리 곁에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

제2 수평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