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여전한 2월의 끝자락.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밤. 학교를 졸업해 떠나는 사람들과 새로이 학교에 발을 내딛는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한 플래카드를 내건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게이 레즈비언 여러분’이라는 수식어는 순식간 플래카드에 의례적 인사말을 넘어선 의미를 부여한다. 이 플래카드를 내건 이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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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람’은 고려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다. 1995년 학내에서 몇몇 레즈비언 및 게이 학우가 뜻을 모아 동아리를 만들었고, 2003년 동아리 연합회의 정식 동아리 인준을 받았다. 처음 동아리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학술모임의 성격을 띠고 퀴어 이론이나 섹슈얼리티 등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었다. 요즘도 학술 세미나를 열고 있지만 친목 도모의 성격이 조금 더 짙어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중앙동아리로서의 다양한 활동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다. 퀴어 영화제를 개최하거나 <퀴어 가이드>를 발간, 타 대학의 성소수자 동아리와 교류하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우리 여기 있어요

‘사람과 사람’의 대표를 만나 플래카드에 대한 소감으로 인사를 건넸다. 혹시 매년 거는 플래카드인지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한 동아리 부원이 제안한 것으로 사람이 붐비는 입학식, 졸업식 시즌에 맞춰 일부러 내걸었다고 한다. 고려대 학우만의 행사가 아닌,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이들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다.

“몇 년 전에도 ‘사람과사람’ 이름으로 플래카드를 건 적이 있어요. 그때는 성 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을 사용하는 등 간접적으로 저희의 존재를 알렸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지개(주1)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홍보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조금 더 직설적이고 과감한 문구를 넣어봤어요.”

내건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홍보 효과가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슬쩍 동아리 규모는 어떤지 물었더니 약 60명 정도의 학우가 가입해 있다고 했다. 13학번 새내기를 받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오갈 데 없는 복학생들이 많이 온다나.

성소수자에 대한 이미지, 편승하거나 개선하거나

동아리를 바라보는 학우들의 시선은 어떨까. 동아리에 대한 루머나 오해가 많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동아리에 가입했다가 아웃팅 당한다더라 혹은 테러를 당한다더라하는 루머가 학우들 사이에 돌죠. 그 밖의 오해라면 뭐, 대부분 사람들이 성소수자에게 덧씌우는 이미지를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좋은 쪽이라면 <섹스앤더시티>에 나오는 것처럼 패션센스 좋고 섬세한 게이 정도? 물론 대부분은 안 좋은 것들이지만요. 호들갑스럽게 과장된 손짓을 하는 ‘여성적인’ 게이는 이미 미디어에서 많이 노출되고 있으니까요. 또 누군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면 ‘나를 좋아하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봐서 동성이라면(게이일 경우 남자, 레즈비언일 경우 여자) 아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거겠죠. 특히 성적 의미에서요.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에 대한 편견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거구요.”

 

실제 성소수자의 모습과 매체가 표현하는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지를 물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들이 보통 떠올리는 여성스러운 게이말고, 상당히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게이도 많아요. 또 패션센스가 좋은 게이도 있는 반면, 썩 패션에 관심이 없는 털털한 게이도 있죠.

성소수자 집단은 그저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정한 이미지가 폭력이 되는 이유는, 하나의 이미지를 상정하는 것이 곧 성소수자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가리기 때문이에요. 그 이미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이미지를 덧씌우기 시작하면, 소수자에게는 강박관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해요.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그것을 충족시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공개적으로 ‘사람과사람’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작년 12월 고려대 재학생 커뮤니티 고파스에는 성소수자 동아리를 없애야 한다는 논지의 글이 게시되었다. 작성자는 ‘사람과사람’의 경우 동아리 홍보를 비롯한 교내 활동이 없고, 대표자 수련회 등의 중앙동아리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조회수는 폭발적이었고 댓글을 통한 학우들의 의견은 실시간으로 이어졌다. 동아리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에서부터, 규정을 지키는 것에 예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까지. 동아리연합회가 해당 사안에 대해 ‘중앙 동아리로서 규정하는 것에 있어 절차상의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해프닝은 일단락되었지만, 200개가 넘어가는 댓글 속에서 성소수자 동아리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개중에는 사람과사람이 자기들끼리 연애하려 만든 동아리 아니냐는 댓글도 있었어요. 동아리 내 연애를 금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아리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많은 활동들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죠.


대놓고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분들이나, 성서를 들이밀며 회개하라는 분들을 일일이 설득하려 하지는않아요. 저희에게도 일상이 있으니까요. (웃음) 다만 저희가 정말로 경계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이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에요. 요즘은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나날이 발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해요.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반감, 편견,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죠.
 
그들이 자신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 건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언행에서나, 인터넷에서 익명이 보장된 공간인 경우가 많아요. 고파스의 게시물에 달린 일부의 몰지각한 댓글을 보면서 이 정도의 의식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이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고, 익명성에 기댄 무책임함이 아쉽기도 했죠.”

 

 

과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의 키워드는 소통

‘사람과사람’은 성소수자 동아리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오해가 켜켜이 쌓여가는 것을 보며 ‘우리가 소통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하고 자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외부 매체의 인터뷰에 자주 응하려 노력하고, 사람과사람 공식 웹페이지나 페이스북 계정을 만드는 등 발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은 <퀴어가이드>는 지금까지 총 12호가 발행되었어요. 초기의 내용은 퀴어 이론이나 차별 반대의 목소리를 싣는, 조금은 무거운 이야기였지요. 이번 12호에서는 조금 더 사람들의 일상에 근접한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담으려고 했어요. 영화를 추천하기도 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나 술집을 선정하기도 하기도 하고요. 아마 보면 재미있으실 거예요.”

 

흔히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벽장 속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비유한다. 그러나 ‘사람과사람’은 벽장을 벗어나 어느덧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쩌면 벽장 속에 갇힌 것은 성소수자가 아닌 다수자 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 만남에서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만남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되기를 바라며.
 

무지개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의 여섯 색깔 무지개는 성 소수자와 다양성의 상징으로, 1978년 길버트 베이커(Gilbert Baker)가 처음 고안했다. 여섯 색깔은 각각 삶, 치유, 태양, 자연, 조화, 영혼을 뜻한다.

<KUEER GUIDE 12> LGBTAIQ 용어 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