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학생회관 5층에는 드나드는 이도 문패도 없는 텅 빈 방이 있다. 이른바 ‘수배자 방’이다. 1998년 12월에 탄생한 이곳은 학생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시위나 집회에 참가했다가 정치 수배자가 된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생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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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지명 수배가 내려진 총학생회장, 단과대 학생회장은 학생회관 중 일부를 은신처로 삼았다. 이후로 학내의 정치 수배자들은 관행적으로 이 방에 머물렀다. 현재 수배자 방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동아리연합회와의 계약을 거쳐야 한다. 지명수배를 받은 학우는 동아리연합회 관계자와 기간을 협의하여 계약서를 작성하며, 지명수배가 해제되거나 공소시효가 끝남과 동시에 방을 다시 동아리연합회에 반납하는 방식이다.

수배자 방을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사람은 42대 안암총학생회장인 정태호(정경대 행정05) 씨다. 정태호 씨는 2009년 4월 등록금 인하 요구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수배자가 되었다. 작년 11월 21일 정 씨가 경찰에 자진 출석해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0월을 선고받음으로써 수배자 방은 다시 빈 공간이 되었다.

 


지금은 인기척이 없는 빈 방이지만, 수배자 방이 고려대 학생사회 내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때가 있었다. 2011년 10월 당시 동아리연합회장이었던 임용수(문과대 영문06) 씨는 학생회관 2층에 정태호 전 회장의 퇴거 요청 공고문을 게시했다. 임 씨는 “동아리연합회가 관리하는 학생회관의 자치공간을 재분배해야 한다”는 이유로 정 씨에게 수차례 논의를 요청했으나 계속해서 거절당했으며, 이에 불가피하게 퇴거 요청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공고문이 게시된 이후 학생회관에는 이 결정에 반박하는 단위들의 대자보들이 줄을 이었다. 고려대 재학생 커뮤니티 고파스에서도 이를 둘러싼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퇴거에 찬성하는 측은 수배자 방이 본래의 상징성과는 달리 사유화되고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정태호 씨가 동아리연합회와의 계약 및 논의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퇴거에 반대하는 측 역시 정 씨의 처사에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인정했으나, 학우들을 대신해 등록금 투쟁을 하다 수배생활을 하게 된 동료 학우에게 가혹한 처사라는 의견이었다.

이후로도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배자 방의 상징적인 의미와 그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있는가, 다른 단위에게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자치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수배자 방을 사용하는 학우가 특정한 정치색을 띠는 것에 문제는 없는가에 이르기까지 논쟁은 심화되었다.

최근 열린 동아리대표자회의에서 3분의 2가 넘는 동아리 대표자가 수배자방 유지에 찬성했고, 동아리연합회 측은 이를 유의미한 결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밝혔다. 학생회관의 공간관리를 담당하는 동아리연합회 회장 홍해린(사범대 디자인조형09) 씨는 “새로운 이용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해당 공간을 빈 상태로 유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현재 수배자 방은 비어있지만, 학생회관 안에 수배자 방은 앞으로도 유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