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비틀즈만큼 위대한 영국의 코미디언 그룹 몬티 파이튼(Monty Phyton)의 멤버 그레이엄 채프먼(Graham Chapman)이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팀 동료인 존 클리즈(John Cleese)는 추도사 말미에 ‘이런 기회를 놓치면 죽은 그레이엄이 실망할 것’이라며 ‘영국 방송 사상 최초로 Shit을 말한 사람으로서 영국 최초로 장례식장에서 Fuck이라 말한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장례식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는 사실 죽은 채프먼의 유언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 한 토크쇼에 출연한 몬티 파이튼의 멤버들은 채프먼과 함께 하겠다며 채프먼의 유골함(이라고 주장하는 단지)을 들고 나왔다. 멤버들은 번번이 유골함을 엎지르고 엎질러진 유골을 진공청소기로 치우는 개그를 선보였다. 진정한 코미디언으로 살았던 고인이 죽어서도 코미디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유족들과 동료들이 의견을 같이한 덕분에 연출된 개그였다.

영화 '독재자'의 홍보 사진ⓒ공식사이트http://www.republicofwadiya.com/

영국 출신의 배우 사챠 바론 코헨(Sacha Baron Cohen)은 파격적인 하드코어 유머와 퍼포먼스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보랏-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문화 빨아들이기Borat:Cultural Learnings of America for Make Benefit Glorious Nation of Kazakhstan (2006)>에서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는 카자흐스탄 리포터 역할을 맡아 카자흐스탄에 대한 비하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 그는 <브루노(Bruno : 2009)>에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게이 방송인으로 출연했다. 여기서 그는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론 폴(Ron Paul)을 유혹하며 바지를 내리고, 아이팟을 주고 사 온 아프리카 입양아에게 O.J.(O.J. 심슨을 연상시키는 이름)라는 이름을 붙여 사람들을 경악케 한다. 최근작인 <독재자(The Dictator : 2012)>의 홍보를 위해 영화 속 독재자 알라딘의 모습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등장해 독재자 동지(?)인 김정일의 유골을 TV 리포터에게 뿌리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코미디는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더라도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특히 정치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풍자할 때 코미디의 기능은 가장 빛을 발한다.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은 첨예한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단순화하여 충분히 해결 가능해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적인 부조리를 낯설게 만들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바라보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방법이 지나쳐 소수자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윤리 규범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코미디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기준으로 판단 받는다.

채프먼의 장례식장에 참석한 이들에서 사챠 바론 코헨을 사랑하는 할리우드의 소비자들에 이르기까지, 현대 대중문화에서 코미디의 면책 특권에 대한 합의는 이미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제 코미디에 대한 이해는 그 사회의 관용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로 쓰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코미디 소재의 제약이 많다고들 한다. 섹스, 정치, 소수자, 인종… 동방예의지국의 전통과 살벌한 권위주의 시절의 잔영을 단숨에 뿌리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위의 소재들은 코미디의 소재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공론장에서의 논의 자체가 터부시되어버린 감도 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여 년간 우리 사회가 이룩한 자유화의 정도에 비해 코미디의 터부를 깨는 노력의 결실은 매우 미흡했다. 한국의 풍자 코미디는 20년간 고(故) 김형곤으로부터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섹스나 정치에 대한 풍자 코미디가 실험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식 콩트 코미디를 지향하는 <SNL 코리아>를 비롯해 <코미디 빅리그>, <썰전> 등 코미디와 예능의 영역에서 기존의 틀을 깨는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정치적 스탠스나 성적 정체성과 무관하게 누구나 웃을 수 있는 재치 있는 코미디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코미디언들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고, 몇몇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미국이나 일본의 코미디를 답습하는 데에 안주하는 제작자들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아직 우리 사회가 코미디에 대해 열린 사회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관객은 물론이고 풍자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들까지 모두 코미디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사회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풍자 코미디가 가능하다. 코미디언이 국회의원이나 유명 논객을 풍자하려면 먼저 변호사를 알아봐야 하는 사회에서는 아주 먼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