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은 사실 사형까지 포함해 아주 강력한 엄벌에 처해야 한다”


작년 11월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10대 성폭행 피해자를 다룬 영화를 본 후 했던 발언이다. ‘성폭행’에 한정해 말하긴 했지만, 성폭행과 같은 중죄를 저지른 사람의 인권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은 일련의 발언들을 통해 범죄자의 인권은 존중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이 발언에 두고 찬반논란이 거셌는데, 그만큼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하느냐 마느냐가 사회적으로도 논란거리이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소속됐던 새누리당 역시 성폭행범에 대한 ‘물리적 거세’ 법안을 발의하는 등 박근혜 대통령과 일맥상통하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영화 '돈크라이마미' 시사회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후보 ⓒ뉴시스



그로부터 한 달 뒤, 박근혜 대통령은 문재인 후보와의 TV토론에서 국정원 직원의 인권을 언급한다. 여론조작을 벌였다고 의심되는 국정원 직원을 민주당이 2박 3일간 감금했다며 민주당을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였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국정원 직원은 국정원법과 선거법을 어겼다고 ‘의심되는’ 피의자였고, 박근혜 대통령은 (믿긴 힘들지만) 정말 그 직원은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시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따르면 그렇다.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문제의 국정원 직원은 대선 기간 수많은 댓글로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것이 검찰 수사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 국정원법과 선거법을 어긴 중죄인인 것이다. 그런데 범죄자의 인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던 새누리당이 여전히 국정원 직원의 인권을 문제 삼았다. 국정원 국정조사가 실시되기 하루 전 검찰은 국정원 직원 감금 혐의로 민주당 전 조직국장을 체포한 것이다. 게다가 성폭행범의 파렴치함에 치를 떨며 사형을 운운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성폭행범과 국정원 직원의 죄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국정원 직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를 받아 민주주의 꽃인 선거기간 동안 여론 조작에 나서면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80년대 수만 명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군사독재에 맞서 얻으려 했던 가치를 단숨에 무너뜨린 것이다. 민주주의가 흔들린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존재 의미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당 신경민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민주’는 국민의 삶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모든 투쟁은 ‘민주’라는 그릇이 받쳐졌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제 다시보자. 국정원 직원의 죄의 무게가 성폭행범과 비교해 감히 가볍다고 말할 수 있나. 조금 오버해서 국정원 직원은 5천만 국민의 삶에 엄청난 피해를 준 범죄자라 볼 수 있다. 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면 범죄자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권 의식은 얼마나 이중적인 잣대를 지닌 것인지가 드러난다. 즉, 박 대통령의 인권 의식은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이 아니라 정치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선 기간 ‘여성의 인권’을 외치며 민주당을 성폭행범과 다름없다고 거세게 비판한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무고한 국민의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인권이라는 가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꼴이 됐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현 상황도 그 때와 다를 바가 없다. 정치 상황에 따라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대통령 하에서 괴로운 쪽은 당연히 그를 믿고 뽑았던(혹은 어쩔 수 없이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국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