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 국토대장정.. 이제는 취업을 위한 스펙이 되어버린 여행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게임, 공략대로 안 하면 바보 취급
락페스티벌 연관검색어엔 ‘락페스티발 패션’, ‘락페스티발 즐기는 방법’까지 등장

 

 

여러 사람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일이 ‘놀이’다. 놀이는 순전히 즐기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제 놀이마저 하나의 스펙이자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제 마냥 즐겁게 노는 것만으로는 ‘잘 논다’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배낭여행과 국토대장정, 취업을 위한 ‘완벽한’ 스펙

 

대표적인 경우가 ‘대학시절에 꼭 경험해야하는 것’으로 불리는 배낭여행이다. 배낭을 메고 가볍게 떠나는 여행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자유로 대표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배낭여행에서 느끼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어떻게 이력서에 살려야하는지가 중요해졌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견문이 넓어진다는 인식과 함께 모험정신을 발휘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으면서 스펙에서 중요한 사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두 달 동안 전국 무전여행을 다녀온 김민석(28)씨는 “자소서에서 나의 패기와 결단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단순 해외여행이나 어학연수보다 특별한 경험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때 더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국토대장정의 양상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나라 국토를 직접 두 발로 완주하는 국토대장정은 스펙의 한 요소로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몇몇 기업에서는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을 열어 대학생들을 이끌고 있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는 노모(25)씨는 지난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주최하는 국토대장정을 다녀왔다. “졸업이 다가오니 스펙에 신경을 안 쓸 수 없다”는 노씨는 “소위 취업5종세트라 불리는 것을 갖췄지만 여전히 불안했다”고 말했다. 하반기 취업을 위해 새로운 스펙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 학교에서 국토대장정 대원 모집글을 보고 지원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부족해 보이는 강한 정신력과 모험심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씨는 “물론 참여 중에는 동료대원들과 힘든 시간을 이겨내야 했기 때문에 협력과 배려 등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국토대장정을 경험해본 사람이 정신력이 강하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없다”며 “그럼에도 체험에 참여한 것은 면접에서 남성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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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업 


 

 

배낭여행, 국토대장정과 같은 놀이가 스펙의 기능으로 작용한 것은 우리사회의 매뉴얼이 그것들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의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유일한 동기가 놀이 그 자체(하위징아:놀이의 개념)’라는 본질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놀이가 스펙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은 가치와 수단이 전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즐기기 위한 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있는 놀이에 ‘스펙’이라는 실질적인 동기가 개입한 것이다.

 


게임은 즐기기 위한 것일까 이기기 위한 것일까

 

뿐만 아니라 게임, 축제, 등산 등 다양한 레저 및 유흥활동에도 지켜야할 매뉴얼은 작용한다. 놀이는 순전히 즐기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잘 놀기 위한’ 매뉴얼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놀든 간에 자신이 즐거우면 놀이의 목적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잘 노는 것’이 곧 ‘즐겁게 노는 것’이 되어 버렸다.

 

 

 

축구팀의 감독이 되어 전술을 직접 짜서 팀을 운영하는 게임을 하고 있는 윤씨는 불쾌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게임에서 기본적인 공략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고 입을 연 윤씨는 “게임을 막 시작할 무렵 고수들로부터 검증된 전술을 따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구한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보통 초보선수들은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고수들의 전술방법을 따라한 후 게임에 익숙해지면 직접 전술을 짜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즐기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게임에서 ‘잘하는 것’을 강요하는 매뉴얼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게임에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이기기 위해’ 캐릭터나 아이템의 레벨이 낮은 사람이 강퇴당하는 일은 비일비재 하다. 박재연(22)씨는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팀플전은 거의 참여를 못했다”며 “이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레벨이 낮으면 강퇴당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대학생 대상 잡지에는 ‘락페 등급별 코스튬’까지 등장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락페스티발에도 매뉴얼은 존재한다. 포털사이트에 락페스티발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에서 ‘락페스티발 패션’, ‘락페스티발 즐기는 방법’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놀고 즐기는 축제에도 매뉴얼이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찾아가면서까지 따르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즐겨보는 잡지에는 ‘락페 등급별 코스튬’이 등장하여, 초급자/중급자/중독자에 맞춰진 복장과 즐기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난 8월 락페스티발에 다녀온 김씨(22)는 “이런 것 까지 굳이 알려줘야 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그런 글을 읽고 나면 왠지 그것대로 따라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며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매뉴얼에 벗어나면 ‘틀린’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이왕 놀 거면 잘 놀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진 상황에서 ‘잘 노는 방법’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각광받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특히 매뉴얼은 여러 차례의 실험을 통해 확실히 검증된 방법이기에 더더욱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다. 즉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잘 놀았다’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놀이에도 매뉴얼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이렇게까지 해서 잘 놀아야 하나?’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윤 모 씨는 “잘 노는 것 자체는 좋은데 솔직히 남들이 다 하는 걸 따라하는 방식으로 잘 논다면 어쩐지 후회가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온전히 계획을 짜기보다는 이런저런 매뉴얼을 참고해서 행동하다 보니 답답하게 느껴진 것. 윤 씨는 그러면서도 “아무래도 나 혼자 사회를 살아가는 게 아니니까 눈치를 아주 안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