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 안 하면 바보. 너무 오래해도 바보. 정말 쉬기만 하면 진짜 바보
휴학(休學)의 주체가 누구인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공부엔 왕도가 없다? 대한민국에선 예외다. 착실히 따르기만 하면 성적 향상을 담보해주는 공부의 절대법칙이 있다. 그리고 이제 공부에만 왕도가 있는 시대는 지났다. 공부를 잠시 그만두고 쉬는 데에도 매뉴얼이 있다. 2013년,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 휴학은 하나의 매뉴얼이 되어 버렸다.


제 1법칙 – 휴학, 선택 아닌 의무사항
‘스트레이트 졸업’. 단 한 차례의 휴학도 없이 4년 만에 졸업하는 것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이렇게 따로 지칭하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서 휴학 없이 바로 졸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휴학 없이 졸업을 한다고 하면 ‘미래에 대한 준비도 없는 놈’이라며 핀잔을 듣기 일쑤다.
스트레이트 졸업을 생각하고 있는 대학교 3학년 이은정(가명,22세)씨는 요즘 고민이 부쩍 늘었다. 이 씨를 걱정하는 주변의 우려 때문이다. “아버지 회사에서 등록금이 나오기 때문에 휴학 없이 빨리 졸업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친구들도 하나둘 휴학을 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러다 취업준비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소리를 하도 들어서 이제는 휴학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있어요.”
제 2법칙 – 1년 이상 휴학은 NO!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럼 얼마나 해야 할까? 대한민국 휴학 매뉴얼이 권고하는 적정 휴학기간은 1년이다. 한 학기만 휴학을 하면 2월이 아닌 8월에 ‘코스모스 졸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졸업시기가 애매해진다. 2,3학년 때 한 학기만 휴학을 한 경우에는 4학년 1학기를 마친 후에 한 학기 더 휴학을 하는 것이 관례적이다. 이 시기에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하며 졸업시기를 맞추는 것이다.
1년 이상의 장기휴학은 쓸데없는 시간낭비란 지적을 받는다. 나태해지기도 쉽고 복학 후 학업에 지장을 줄 거란 이유에서다. 나이가 경쟁력인 시대에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게 유리하다는 이유도 있다. 학교 차원에서 장기 휴학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1년 이상 장기 휴학을 신청하는 경우, 지도교수나 학과장의 수락 서명을 요구하는 등의 복잡한 절차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황승빈(24세)씨는 “3년 휴학을 신청했는데 학교에서 허락을 안 해줬어요. 과 사무실에서는 교수님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고 교수님은 휴학을 만류하시고요. 천신만고 끝에 휴학을 하긴 했지만 정말 힘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제 3법칙 – 휴식은 금물, 진짜 쉬기만 하면 넌 멍청이!
휴학을 신청했다. 단언컨대 이제부터 당신이 가장 많이 듣게 될 말은 ‘휴학하고 뭐 해?’일 것이다. 휴학(休學). 말 그대로 학업을 쉰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정말 잘 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돈을 벌든 스펙을 쌓든 여행을 가든. 뭐라도 ‘해야’ 한다.
이번 학기 복학을 앞둔 손시내(22세)씨는 지난학기 내내 이런 압박감에 시달렸다. 손 씨는 팍팍한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껴 별 다른 계획 없이 지난학기 휴학을 신청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2학년 까지. 14년간 쉼 없이 학업을 계속했어요. 이쯤이면 한 번 쉬어줄 때도 된 것 아닌가요? 굳이 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요.”
제 4법칙 – 매뉴얼 뫼비우스의 띠, 스펙 쌓기 & 여행
마냥 쉬지만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대한민국 휴학 매뉴얼이 권장하는 활동은 두 가지다. 스펙 쌓기, 그리고 여행. 얼핏 보면 서로 상반된 듯하지만, 두 활동 모두 매뉴얼 사회의 산물이란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스펙이란 취업 시 이력서를 채울 수 있는 경력 사항들을 말한다. 지속적인 취업난에,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취업 전선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기를 쓰고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영어점수, 자격증, 대외활동, 공모전, 봉사. 취업을 위해선 어느 한 가지도 빼 놓아선 안 된다. 다른 경쟁자들도 다 하는 것들이기에, 그들보다 뛰어나려면 학기 중에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문에 휴학을 하고 오로지 스펙 쌓기에만 매진하는 것이다. 취업의 매뉴얼화가 부른 비극이다.
대학생 임세현(가명,23세)씨는 지난 학기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임씨는 한 학기 휴학을 신청하고 대형 광고 회사의 인턴으로 일했다. 임씨는 9시 부터 6시 까지는 인턴 활동을 하고, 그 이후에는 영어 학원을 다녔다. 공모전 준비도 빼놓지 않았다. 임씨는 “주변에서 하도 이왕 휴학한 거 ‘뽕을 뽑아’라며 아우성이어서 인턴에 토익, 공모전까지 했어요. 자기소개서에 들어갈 몇 줄과 제 반년을 맞바꿨죠”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스펙 쌓기를 권유하는 동시에 여행 또한 권유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철저히 매뉴얼에 따라 살아간다. 초중고 12년, 대학 4년, 그리고 직장생활. 계속해서 매뉴얼에 의해 규제되고 통제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휴학은 매뉴얼 단계의 최고봉인 직장세계로 편입하기 이전에, 일상의 매뉴얼로부터 장기간 벗어나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때문에 이 마지막 도피처를 맘껏 즐기라는 이유에서 여행을 권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매뉴얼의 도피처인 여행이 오히려 대학생들의 휴학생활을 옭아매는 족쇄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휴학기간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고 하면 ‘휴학하고 여행도 안 다녀오고 뭐했냐’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듣기 일쑤다.
휴학(休學). 쉬는 시기이다. ‘쉼’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타인이 나에게 ‘쉼’을 주입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본인 스스로 ‘쉼’을 느끼지 못한다면 제대로 쉬는 것이 아니다.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쉬는 동안, 뭘 하면서 어떻게 쉴 것인지는 본인 스스로 정해야 한다. 휴학 매뉴얼 100단계를 클리어하는 것보다, 비록 이루지 못하더라도 나만의 휴학 계획을 짜서 도전하는 것이 더 가치있을 수 있다. 눈치보지 말고 내 방식대로 할 거 하면서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