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정상을 향한 투쟁다만 이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한 것이다우리는 이제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시지프스는 신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산 위에서 바위를 굴리는 형벌을 받았다정상에 바위를 놓으면 형벌은 끝나지만 그때마다 바위는 밑으로 굴러가서 다시 위로 밀고 올라가야만 한다영원히 굴러가는 쳇바퀴나 다름없다그런데 카뮈는 시지프스의 영원한 형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시지프스의 형벌이 정상을 향한 투쟁이라고 하며 우리에게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하라고 한다

ⓒ부산일보

카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카뮈는 시지프스가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다. 세계의 부조리함을 깨달아, 어떤 목표 및 희망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계는 개개인의 희망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부조리함에 항상 직면해 있다. 시지프스는 절대로 바위를 산 정상에 놓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바위를 산 위로 굴린다. 희망은 없지만, 이미 시지프스는 바위를 미는 행위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럼으로써 그 나름대로 신에게 저항한다.


매뉴얼을 따르는 사람들의 심리 속에는 희망이 들어 있다. 어떤 것이든 쉽게 성취하고자 하는 희망, 그럼으로써 불안감과 조바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이다. 그러면서 일시적으로 세계는 자신의 곁으로 오게 되고 사람들은 잠시 동안이나마 안정을 얻는다.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과연 자기 자신은 온전히 나타나는가? 그 욕망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만들어졌다. 외부에서 내부로 전유되는 과정에서 마치 자기가 직접 생각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번번이 그것이 외부에서 유발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에 대해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뮈의 말처럼 삶이 정말로 부조리한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점은 분명히 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설계한 삶을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혹시 어딘가에 끌려가고 있진 않을까? 현대인들은 단순히 형벌만 받는 시지프스와 같다. 바위를 정상에 두기 위해 애를 쓰는 시지프스처럼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끝없이 나아간다. 그러나 번번이 바위는 굴러 떨어지고 그때마다 좌절감에 휩싸인다. 카뮈가 말하는 시지프스도 겉보기에는 매우 불행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시지프스는 이미 벗어났다. 형벌 속에서 나름대로 그 자신이 삶을 이끌고, 신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조바심에 몸을 떨 필요도 없다. 그는 이미 세상의 부조리를 간파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오직 그 자신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장 카뮈의 시지프스처럼 행동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취할 것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냅다 뛰는 게 아니라, 성취하기 위한 행동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점검을 해 볼 수는 있다. 과연 이것은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내가 정말 이것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는 거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해도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삶이 오로지 무언가를 이루는 것으로만 이뤄져 있다고 하면, 과연 그것은 정상적인 삶일까. 그런 삶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비극적인 운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