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함20

한손으로 내 나이를 셀 수 있었던 때 나는 서울로 왔다. 학창시절 모두를 서울에 있는 학교에서 다녔다.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경상남도 사투리를 잘 알지도 못한다. 나의 기억 대부분은 서울이라는 도심에서의 생활에서 기인한다. 이즈음 되면 서울 토박이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 스스로 의문스럽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 나는 ‘서울’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전산상 거주지로 등록해본 적도 없는 ‘창녕’을 떠올린다. 외할머니가 쪄주신 옥수수를 사촌형제와 먹던 추억이 내 머릿속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그곳이 내게는 고향이나 다름없다.
굳이 이런 사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밀양의 송전탑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다. 송전탑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2007년부터 창녕과 밀양은 함께 공사 백지화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2012년 11월 창녕에는 9기의 765kV 송전탑이 세워졌다. 아니 161개의 송전탑 중 밀양 구간 52개만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밀양 주민들이 아직도 그 높은 철탑에 맞서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주민들이란,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할배할매들’이다. 나의 외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성성한 백발, 단정한 차림새, 눈가와 손에는 주름이 깊게 잡힌 노인들이 아직도 산을 오르며 송전탑 공사 강행을 반대하고 있다.
밀양 송전탑 인권조사단이 7월 3일 발표한 『밀양 765kV 송전탑 인권침해조사단 보고서』는 인권의 영역에서 조사된 내용이지만 송전탑 공사가 얼마나 부당한지에 이해하기에 좋은 자료다. 보고서는 밀양 송전탑 사태로 인한 주민들의 인권 침해를 6가지로 분류한다. 협의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 재산권 침해, 한전·시공사·용역의 인권 침해, 경찰의 인권 침해, 건강권 침해, 그리고 공동체의 파괴가 그것이다. 평균연령 70세에 육박하는 고령의 마을주민들은 이 모든 인권 침해를 어깨로 견뎌내고 있다. 이중 ‘공동체 파괴’를 제외한 앞의 다섯 가지는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연이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기사와 뉴스를 통해 앞의 인권 침해 사례들을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파괴란 무엇을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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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은 한국전력이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기 위해 주민 중 일부에게만 금품, 식사 대접 등의 물질적인 보상을 주었음을 지적한다. 대표성이 없는 일부 주민과의 합의만을 근거로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한전의 분열조장 행위는 각 마을 공동체를 갈등상태로 만들었다. 일부 주민이 한국전력과의 거래에 응하자, 투쟁을 지속하던 주민들과 서로 적대적 불만과 불신이 팽배해졌다. 지난여름 밀양 동화전 마을을 방문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내게 던진 인사말은 “누가 보내서 왔느냐. 어디서 왔느냐”였다. 회관에서 어르신께 들은 바로는, 한전의 회유에 응한 마을 주민은 집 밖으로 좀처럼 나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서로를 향한 끝없는 의심과 긴장으로 마을공동체는 파괴됐다. 이는 ‘할매와 할배들’에게 반대 투쟁이라는 권력과의 싸움보다 피곤하고 비참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밀양을 보도하는 일부 언론은 이런 공동체의 파괴를 보다 확장하고, 극한 상태로 이끌고 있다. 조선일보는 현재 밀양 주민들의 투쟁 뒤에 ‘외부세력’이 있어 주민들의 선동하고 극심한 투쟁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는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 연대하는 이들을 폭력을 유도하는 선동집단쯤으로 규정하여 매도한다. 더욱이 일부 언론들의 왜곡 보도는 현재 자발적으로 보상을 거부하면서 반대하는 주민들의 정체성을 선동에 휘말리는 우매한 노인들 또는 지역이기주의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방해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을 확인조차 하지 않은 조선일보의 몰지각한 보도는 이제 한국사회라는 커다란 공동체를 위협한다. 있지도 않은 ‘외부세력’에 대한 보도는 또 다른 불신과 불만을 야기한다. 연대하는 이들은 하루아침에 돌연 밀양주민을 ‘선동’하는 ‘외부세력’이 됐다. 끝없는 상호불신 상태를 조장하고, 서로 간의 대화가 지속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는 한전의 행위와 다를 바 없이 공동체를 파괴한다.
 
나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을 떠올려본다. 푸른 논밭이 펼쳐져 있고, 진한 녹색을 발산하는 산이 나를 겹겹이 감싸주던 곳. 어린 손주를 반겨주시던 외할머니와 사투리가 어리숙한 ‘서울촌놈’을 놀리던 사촌들이 있던 곳. 나의 향수는 고향과 지척에 있는 밀양으로 이어진다. 밀양 동화전 마을회관의 할머니는 어제의 ‘이웃사촌’이 오늘의 ‘적’이 된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송전탑이 설치되면 손주들이 올지나 모르겠다며 혈육과의 이별을 걱정해야 했다. 마을공동체는 파괴됐다. 그런데 한전은 송전탑 공사를 강행했고, 일부 언론은 반대하는 주민들과 이에 연대하는 이들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한전과 일부 언론의 ‘쿵·짝’이 지속하는 한 공동체의 파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공동체가 파괴되기 전에, 밀양의 할매와 할배가 겪는 고된 나날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을까. 밀양을 대하는 일부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담한 태도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