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명 정원의 대형 교양 수업. 파워포인트 화면을 띄워놓고 강의하던 교수가 원격 포인터로 슬라이드를 넘기자, 학생들 쪽에서 각양각색의 찰칵소리가 일제히 들려온다. 손을 힘껏 뻗어 띠딕초점까지 맞춰 사진을 찍는 사람, 거대한 태블릿PC를 가로로 들어 촬영 버튼을 누르는 사람… 플래시와 촬영음 세례를 한껏 받은 교수는 멍해진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강의실인가 레드카펫 위인가.’

카메라 세례를 받는 레드카펫 위의 해리슨 포드도 그 순간의 교수만큼 당혹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웹툰의 한 장면? 아니다. 칠판과 분필 대신 프로젝터 화면과 컴퓨터 키보드가 들어서고, 스마트폰의 화질이 눈부시게 개선되면서 대학교 강의실에 등장한 이른바 ‘ppt 슬라이드 사진 찍기’. 디지털 시대의 신개념 수강 방법이다.

문서작성 프로그램 ppt(powerpoint)는 깔끔한 정리화면을 보여주고 사진, 동영상 등 다양한 자료를 첨부할 수도 있어 편리하기 때문에 대학교 강의실에서 널리 쓰이고 있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ppt에 적힌 글자와 이미지를 수강생들이 사진으로 찍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음의 두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 #1. 이화여대 미학 교양 수업 / 200명 정원 (제보자: 박 모 씨, 교수, 55)

 

수강생이 150여 명이 넘는 교양 수업에서 교수가 학생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 그걸 노렸는지 여러 명의 학생들이 강의실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ppt화면을 찍어댔고, 강의 중이던 박 교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수업 교재를 요약해놓은 것에 불과해서 굳이 사이버 강의실에 올리지 않았는데, ppt 자체에 활자가 많다 보니 일일이 필기하기 귀찮은 학생들이 사진을 찍으려 한 것 같다.”는 추측과 함께 제보자는 자못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지난 학기말 실시한 강의평가에서 다른 학생의 촬영으로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의견을 준 학생이 많아 이번 학기에는 찍지 못하도록 명시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사례 #2. 동국대 국문학과 전공 수업 / 50명 정원 (제보자: 윤 모 씨, 국문학도, 24)

 

손 필기로 명망이 높은 국문학과에도 ppt가 도입됐다. 그러나 제보자 윤 씨는 선생님이 ppt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중심 소재나 예문만 ppt로 보여주고 강의의 비중을 높게 사는 분임을 강조했다, 글자가 빼곡하지도 않은 슬라이드가 바뀔 때마다 카메라 촬영음이 연달아 2-3번씩 울려서 뒤를 돌아보니 두세 명의 학생이 화면을 사진 찍고 있었다고. 윤씨는 수업에 방해되니 자제해달라고 강사가 부탁했음에도 패기 넘치게 계속 촬영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ppt 파일을 사이버 강의실에 올려주시기까지 하는데, 어지간히 귀찮아하는 것 같다.”

 

위의 두 경험담은 모두 신종강의실 진풍경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다. 수업의 성격에 따라 어떤 이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이미 상당수의 학생들이 한두 번쯤 목격한 모습이다. 학생들은 왜 ppt 화면을 찍을까. “선생님이 ppt를 사이버 강의실에 올리지 않으면 수업하신 내용을 다시 못 보게 되는 거니까, 일단 저장한 뒤에 다시 공부할 때 보려고 사진을 찍어둔다.” 성균관대 김나영(21)씨의 말이다. 전화 벨소리처럼 계속 울리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작게 하거나 무음으로 하면 별로 방해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강의실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www.aving.net)



한편
, 대형 강의의 경우에 사진 찍는 학생들은 더 많다. 지난학기 영화 관련 교양 수업을 들었던 연세대 이호경(22, 가명)씨는 교수님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기 쉽지 않으니까 더 사진 찍기 수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찍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괜히 불안해서 덩달아 찍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이씨는 수업을 컴퓨터 키보드 타자로 받아 적는 학생들은 많이 있는데, 그것과 달리 사진 찍는 행위는 무음이라는 대안도 있고, 손 필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소리를 내면서 촬영을 하는 배려심 없는 태도가 기분 나쁘다고 말했다. 건국대 커뮤니케이션 학과수업을 듣는 황소영(24)씨의 의견도 비슷했다. “사진 찍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갑자기 소리가 들리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바로 뒤에 앉은 사람이 사진을 찍으려고 팔을 뻗는 게 느껴져서 움찔한 적도 있다.”

이처럼 학생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일차적으로 소리 때문에 수업의 흐름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어 강의자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ppt 내용에 포함된 자료의 각종 저작권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는 민감한 부분도 존재한다.

이화여대 진선영 강사의 의견은 강의실 내 레드카펫 현상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그는 “ppt에 문헌의 일부를 직접 인용하기도 하고, 기관으로부터 허가받아야 사용할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 등을 첨부하기도 한다”며 학생들에게 자료를 나눠주기는 하지만, 온라인상의 무단배포 예방을 위해 온라인에 업로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저작권 문제를 고려해 수업 중 사진 및 동영상 촬영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배려의 차원을 떠나, 문제가 될 가능성이 알고 있다면 사진촬영은 스스로 자제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